오랜만에 보는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북한소식이 주성하기자 블로그에 올라와서 개인적으로 보관해 두고 싶어 퍼 왔습니다. 아울러 비슷한 내용이 월간 조선에도 올라왔기에 비교해 보기위해 둘다 퍼 왔습니다.
중요한점 혹은 의문 되는 부분은 밑줄을 쳐두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북한에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 보세요.
나는 1990년대 후반부터 탈북하기 전까지 북한 중앙급 기관에서 일하다가 탈북했고 얼마 전에 한국에 도착했다.
■ 2008년 1월, 4개 중앙기관에 ‘청년장군 김정은’ 받들라는 지시 하달
김정은이라는 이름이 평양 고위층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1월이었다. 그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2008년 1월 중순경, 중앙당,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네 개 단위에 김정일 말씀이 떨어졌다.
이들 4개 중앙기관 청사에 들어가면 정문에 유화로 그린 김일성, 김정일 입상화가 있다. 대체로 옥류관 다리 위에 김일성과 김정일이 서 있고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그림인데, 정문 들어가면서 왼쪽으로, 입상화에서 나오면서 볼 때는 오른쪽으로 김일성 교시가 있다. 말하자면 ‘동무들이 앞으로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 김정일 동지를 잘 받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그 맞은편 왼쪽에, 들어가면서는 오른쪽으로 김정일 말씀이 붙었다. ‘동무들이 지금까지 나를 받들어 일을 잘해온 것처럼 앞으로 청년장군 김정운 대장 동지를 잘 받들어 모시고 수령님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수하도록 하여야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김정운이라고 되어있었다. 그전까지는 쉬쉬하면서 후계자 김정운이 어쩌고저쩌고 하길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김정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김정일 말씀을 보니까 ‘김정운’으로 되어있었다.
(왜 김정운 에서 이름을 김정은 으로 바꾸었을까요?)
그 이전부터 최고위급에서는 후계자에 문제가 논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008년 1월부터 김정은에 관해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때 김정은이 인민무력부 상임조직부국장 사업을 본 것으로 알고 있다.
인민무력부 조직부국장이 김정각이었는데, 김정은은 말하자면 명예직으로 인민무력부 사업을 관리했던 것 같다. 2008년 1월에 4개 중앙기관으로 김정일 말씀 떨어진 것 외에는 김정은과 관련한 소문이나 김정은이 직접 내린 지시는 없었다. 그런데 중 2009년 2월 들어서 김정은이 국가안전보위부를 담당하게 된다.
■ 2009년 2월 국가안전보위부 맡은 김정은, 공식적 첫 지시 내려
2008년 김정일이 중풍으로 쓰러진 것은 한국에 와서 알았다. 2008년은 공화국 창건 60돌이 되는 해이다. 당시 9·9절 행사에 김정일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김정일이 쓰러졌다는 것은 몰랐고 다만 김경희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정일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죽어서 애석한 마음에 국가행사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런 소문을 당국에서 일부러 퍼트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0월쯤에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잡기 위해서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에서 따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2009년 1월 8일부터 평양시 중앙기관을 중심으로 김정은을 내세우기 위한 당세포별 포치(지시)가 내려왔다. 그때부터 1월 8일이 청년장군(김정은) 생신일이라며 나온 노래가 ‘발걸음’이다. 그리고 2월 김정은이 국가안전보위부를 담당하게 된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국가안전보위부 부국장 계열에 있던 사람이 나에게 ‘청년대장이 우리 국가안전보위부를 담당했다’며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청년대장이 담당하면서 미국산 승용차 링컨 9대를 가지고 왔다며, 국가안전보위부가 우세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 후에 인민보안부 중급 간부와 이야기할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불만을 표출했다. 지금이 평화시기인데 국가안전보위부를 맡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화시기에는 인민보안부가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승용차도 이왕이면 인민보안부 책임 일꾼들에게 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했다.
북한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힘드니까, 한마디로 섭섭하다 정도의 표현이었다. 인민보안부 내부적으로는 자기네들을 치켜세워주지 않는다는 불만이 많다. 채문덕(사회안전부 정치부장으로 심화조사건 때 숙청됨) 이후부터 인민보안부가 수세에 있는데 조금 내세워 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던 중 2009년 6월 25일, 청년장군 지시 때문에 평양시에서 비사회주의 그루빠인 ‘625그루빠’가 조직되었다. 6월 25일 지시는 김정은의 공식적 첫 지시로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로 내려왔다.
내용은 ‘평양시 공원 곳곳에서 청년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출근하지 않고 주패(카드)와 장기를 하면서 도박을 하고 있다. 이것을 원천 봉쇄하고 뿌리를 뽑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625그루빠’는 국가보위부 1부부장이 책임을 지고, 중앙검찰소 부소장, 보위사령부 부사령관, 인민보안부 부부장 4명이 중앙 상무그루빠로 편성되었다. 그 밖에도 각 구역 보안서와 구역 검찰소 합동 그루빠가 편성되었고, 지역별 도 보안국에서 기동타격대를 편성해 평양시에 올려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민보안부 정치대학, 국가안전보위부 정치대학 졸업생들로 그루빠를 보강했다. 이유는 평양시 사법검찰단위로는 검열이 부족할 만큼 대대적이었기 때문이다.
■ ‘625방침’으로 한 달 동안 400여 세대가 평양에서 추방돼
주로 주패를 하던 사람들은 ‘제쏘’라는 사람들이다. 북한에서 러시아로 건설노동 나가는 사람들을 일컫는데, 이 사람들이 러시아로 발령을 받고 나면 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대기시간이 있다.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대기를 하다 보면 하는 일은 없고, 집에 있으려니 갑갑하므로 주로 공원에 나가서 주패를 했다.
당시 ‘625방침’으로 인해 잡혀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누구와 주패를 했는지 심문이 진행됐고, 그들의 입에서 이미 러시아에 건설 노동자로 간 사람들 이름이 나온 것이다. 러시아로 노동 간 사람들까지 잡아들이기 위해 2009년 8월 중순, 전용 비행기를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기까지 했다.
당시 각 보위원과 보안원들이 명단을 갖고 러시아 청부건설사업소(하청사업을 맡아서 하는 실무사업소)에 가서,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니 평양에 가야 한다고 속여 비행기를 태웠다. 비행기 밖에서는 도망칠까봐 일단 비행기에 태운 후에 족쇄를 채웠다. 어쨌든 비행기 안은 공화국 영토로 보니까 거기서 족쇄를 채워 평양비행장까지 와서 수감조치 했던 것이다.
‘625방침’으로 잡혀 온 사람들은 최소 교화 2년형부터 7년형에 처했고 그 가족들은 평양에서 다 추방되었다. 2009년 8월 한 달 동안 추방된 수만 400여 세대로 보고되었다. ‘625방침’은 ‘청년장군’ 지시로, 김정은이 북한 내에서 자기 권력을 행사한 첫 번째 지시였다.
당시 ‘625방침’ 이후 여론은 굉장히 안 좋았다. 말하자면 사람들 인식이 주패도 일종의 놀이고, 경기라는 생각이 많았다. 올림픽이나 국제 경기도 상금을 놓고 하는데, 아무리 사람들이 심심풀이 삼아 하는 주패라도 한두 시간 하고 나면 지루하니까 경기의식(게임 긴장의식)을 높이기 위해 많은 돈도 아닌, 북한 돈 100원, 200원 갖고 하는 것을 추방까지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일흔이 넘은 노인네들도 다 잡아갔으니, 노골적으로 의견은 못 내더라도 사람들 여론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평양시 각 동 인민반으로 공원에 나가지 말라는 포치(지시)가 내려왔다. 공원이란 인민들이 즐기라고 만들어 놓은 곳인데 공식적으로 나가지 말라는 포치(지시)가 내려오니 당연히 안 좋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부들끼리도 ‘625방침’을 두고 너무한다는 분위기였다. 간부들이야 사실 사회주의를 고수하는데 적극적인 지지자, 동정자들 아니겠나? 간부들끼리도 김정은이 자기편을 만들기보다 적을 만든다는 의견이 많았다. ‘625방침’이 정확히 ‘청년장군’ 지시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카드놀이 한 사람들을 과도 하게 잡아 들인것은 김정은의 원래 뜻이라고 보기 보다는, 부하들이 과잉 충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지도자의 명령 하나가 인민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단적이 예인듯 합니다.)
■ 당대표자대회 전, 평양시 꽃제비·미거주자 70만 명 척결 단행
2010년 9월에 당대표자대회 개최 관련 포치(지시)가 내려온 것은 7월 말이었다. 5월부터 각 세표별, 초급당별로 대표자 추천 사업을 진행해서, 각 지방당별, 초급당별로 대표자 추천을 했고 7월 말까지 중앙대표 선출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중앙대표 선출이 끝나면서 9월 5일경 당대표자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가 났는데, 8월 중순경에 청년장군의 특별지시가 내려왔다. 특별지시는 한마디로 평양시에 꽃제비(집이 없는 가난한 어린이)가 많고 미거주자가 많은데 이들에 대해 정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평양에는 불법적으로 지방에서 올라와 사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평양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양시를 봉쇄한다고 해도 들어오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평성은 자전거꾼들이 많다. 그들 말을 들어보면 당시 북한 화폐로 5만원이면, 자전거에 태우고 초소를 에둘러 돌아 넘어 평양까지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일단 평양에 들어오면 숙박검열에서도 찾기가 어렵다.
평양시 숙박검열이 강한 편이기는 하지만 한 개 구역도 동시에 진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검열에 걸리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한 개 구역 안에 여러 개 동을 분리해서 검열하는데, 그때마다 보안원들이 뇌물을 받고 통보해준다. 예를 들면 오늘은 00동네를 숙박 검열을 하니까 다른 쪽 길은 안전하다는 식이다. 그러면 웬만하면 걸리지 않는다. 또 걸리더라도 돈만 있으면 무마할 수가 있다.
평양시에 대체로 20~30개 인민반마다 오물장(쓰레기장)이 하나씩 있다. 그런 오물장에 모여드는 꽃제비들이 5~7명 정도 된다. 1개 동에 오물장이 10개 정도 있는데, 계산해보면 1개 동에만 꽃제비가 50~70명이 있다는 이야기다. 평양시 매 구역에 15~20개의 동이 있으니까, 23개 구역을 계산해 보면 꽃제비 수가 절대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결혼은 평양사람과 했는데 거주하지 못하고 와 있는 사람들이나. 지방에서 살기 어려우니까 평양에 올라온 사람, 그리고 지방에서 사고치고 평양에 숨어든 사람 등, 인민보안부에서 집결한 수만 70만 명이었다(평양시 인구는 중심구역은 250만 명, 주변구역까지 보면 약 400만 명으로 추산).
김정은은 당대표자대회를 앞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다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8월 말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가 한 달 동안 비상에 걸렸었다. 오물장에 있는 꽃제비들, 지방 사람들, 지하철도마다 오가는 사람들 모두 증명서를 확인했고, 지방 사람이면 증명서가 있건 없건 무조건 구류장에 넣었다. 일단 넣어놓고 왜 평양에 왔는지, 거처는 어디인지를 조사했다.
꽃제비들은 거의 다 숙청해서 각 지방의 집결소를 통해 구호소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구호소는 17살 미만의 아이들에 한해서 가는 곳으로 각 도에 있다. 꽃제비들은 고향이 어디인지 조사하고 각 도에서 호송인원들이 와서 축출해 갔다. 그밖에 다른 부랑자들은 평양시에서 범죄행위를 조사해서 감옥에 보내거나 집결소에 보냈다. 국가적 범죄가 아니면 자기 고향으로 호송해서 ‘평양 비법거주’ ‘장기주둔’ 명목으로 노동단련대를 보냈다.
불법적 평양 거주자들을 숙청하는 작업은 그렇게 진행했고, 별도로 조치한 것이 당대표자대회 보름 전부터는 평양을 완전히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회 개최 이틀 전부터는 평양시 거리에 주민들이 나가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했다. 인민반으로 불필요하게 거리에 나가지 말라는 포치(지시)가 내려졌다. 우리 기관도 되도록 사무실에서 일을 보라고 지침이 내려왔다. 그렇게 모두 정리를 하고 나서야 9월 28일에 당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 ‘625방침’ ‘꽃제비·미거주자 척결’ 등으로 부정적 인식 많아져
‘625방침’때도 그랬지만 이때도 사람들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좋게 보기도 하고 나쁘게 보기도 했지만 대체로 꽃제비 처리에 대해서는 안 좋게 생각했다.
최근 들어 평양시에 과부가 많이 생겼다. 그래서 지방에서 올라온 남자들이 과붓집에 유숙하기도 하고 같이 살기도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 사기당한 사람이야 당연히 진작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한다고 속 시원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꽃제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동정하는 분위기였다. 오물장에는 부식물이나 탄재가 많은데, 그것들이 부식되면서 증기가 올라오면 나름 따뜻하다. 오물장은 꽃제비들의 안식처나 다름없는 곳이다. 오물장에서 생활하는 꽃제비들마저 숙청하자 사람들 여론이 대단히 안 좋았다.
중앙 간부 사택 아파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경비가 서기 때문에 아무나 올라올 수가 없다. 그런데 경비가 없는 일요일은 새벽부터 시끄러워 살 수가 없다. 5~10분마다 꽃제비들이 밥 좀 달라며 초인종을 눌러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 갓난아이를 업고 와서 동냥하는 것은 사람들도 많다. 2010년 당대표자대회 하기 전에 특히 심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다.
갓난아이 업고 동냥하는 사람은 지나칠 수가 없어 몇 번 도와주기도 했지만, 꽃제비들은 도와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한번 먹을 것을 주면 그 집은 꽃제비들 사이에서 먹을 것을 주는 집으로 소문이 난다. 일단 동정심에 먹을 것을 주기 시작하면 꽃제비들이 매일 같이 찾아오기 때문에 생활이 안 된다. 그래서 밥이 썩어 오물장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꽃제비들에게 주면 안 된다. 그 정도로 꽃제비들이 평양시에 많았는데, 김정은이 그것을 다 숙청하고 나서야 당대표자대회를 진행한 것이다.
간부 사택이 조금 더 심한 편이었지만 일반 아파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평양시에 웬만한 아파트는 다 경비가 있다. 중앙당 사택이나 중앙기관사택의 경우, 중앙기관에서 근무하다가 연료부장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경비를 서고, 일반아파트는 인민반에서 교대로 나와 경비를 서고 경비비를 준다.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인데 이처럼 포악하게 가난한 자들을 내 쫒아 버린다면 지도자에 대한 인상은 자비함 보다는 악랄하고 무자비한 지도자란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게 될것 같습니다. 아무리 말로 인민들을 위한 지도자라고 해도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씨알이 먹히지 않겠죠..;)
■ 간부 자녀들 중앙대학 입학 막자 간부들 “모독하나?” 반발
2010년 12월경, 북한 간부들을 자극하는 특별지시가 내려왔다. 김정은이 지시한 것으로, 비서국 간부 자녀들은 중앙대학을 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김정일 시기에는 없었던 일로, 간부들 속에서는 폭풍 같은 반항심이 일어났다.
중앙대학이라 함은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외국어대학, 경공업대학, 기계대학 이런 곳인데, 평양에 있는 중앙대학에 평양에 있는 비서국 자녀들을 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군사복무하고도 굳이 대학 가서 공부하겠다고 하면 지방에 있는 대학에 보내라고 했다.
(이점이 매우 궁금합니다… 왜 평양의 비서국 자녀들을 평양대학에 보내지 못하게 한것일까요? 모든 간부들의 세대 교체를 하기 위해? 정말 시골의 평민들을 데려다 새로운 간부층을 만들기 위해? 정말 이해가 안되는 대목입니다…)
왜 이런 지시가 내려졌는지 구체적으로 전해진 것은 없었지만, 우리 간부들끼리 수군거리기에는, 간부 진영을 교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왜냐하면, 간부 자식들을 중앙대학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앞으로 간부로 진출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그다음에 또 나온 지시가,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 현실 체험을 해서 일을 잘하면 그때 평양으로 소환하라는 지시였다. 이 지시가 내려오자 간부들 사이에서는 간부들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군사복무를 무조건 시키라고 해서 보내놨는데, 대학도 못 가는 현실이 된 것이다. 예전에는 군사 복무 기간 10년 중에 5~6년 정도 되면 대학 추천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만기 복무를 하지 않으면 대학 추천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즉 10년 복무를 다 마쳐야만 대학 추천이 가능한 것이다.
군사복무 만기 제대증을 받고 대학을 추천받는다고 하면 벌써 나이가 29살이다. 그런데도 비서국 간부 자녀들은 지방대학에 가라고 하니 당연히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군 복무 도중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은 인민무력부 교육생뿐이다. 인민무력부 위탁은 군사복무 4년부터 가능하다.)
물론 현실적으로 간부들은 사업해서(뇌물 등) 70%가 중앙대학에 보내지만, 어쨌든 간에 과거에는 대학 보내는데 뒷돈으로 1,000달러가 필요했다면, 이제는 중앙대학을 올 수 없다는 지침 때문에 2,000달러까지 써야 가능해진 것이다.
돈 있는 간부들이야 말했듯이 70%는 사업해서 대학에 보내지만 외곽적으로는 김정은의 지침이 모두 집행된다고 봐야 한다. 내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 지침이 철회된 일은 없었다. 다만 집행되지 않은 지침이 있다면 군사복무 연한을 13년으로 늘리는 문제였다.
■ 김정은의 ‘3월 지침’, 군 복무 연장과 여성의 군사복무가 핵심
2010년 3월 또 다른 지침이 내려왔다. 3월 지침의 핵심은 인민군대 복무연한을 늘리고, 여자도 군사복무를 하지 않으면 대학에 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지시는 작년부터 공시되었다. 이전에는 여자는 고등중학교만 졸업하면 대학을 갔다. 그러나 작년부터는 여자가 군대에 가지 않고서는 대학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무조건 군사 복무 4년을 마쳐야만 대학에 갈 수 있다.
2010년에 왜 이런 지침이 나왔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2010년은 95년 출생자들이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기 시작하는 해이다. 그런데 2005년 하반기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아이를 많이 낳지 못함으로써, 작년 재작년부터 군대에 나가야 하는 인원수가 크게 모자라게 되었다.
그래서 작년에는 96년 출생자들도 군대에 나가기 시작했고 중학교 졸업생 남자에 한해서는 다리를 절지 않는 이상 100% 군대에 내보냈다. 과거에는 시력이 나쁘거나 키가 작거나 하면 면제가 되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없다. 시력 검사도 안경을 끼우고 하고 키도 100cm 이하만 아니면 다 군대에 내보낸다.
군대가 완전한 의무는 아니다. 만약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안 가고 사회에 나와서 일하겠다고 하면 군대에 안 가도 된다. 그러나 대학에 가겠다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군대에 가야 한다.
또 같은 해 12월에 무슨 지시가 나왔는가 하면, 인민군대 내에서 여성중대를 없애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군대에 여자 군인들이 남아돌게 되었다. 원래 딸을 가진 부모들은 군사 복무에 크게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새는 여자들도 대학에 보내는 시대다 보니, 대학에 보내려면 무조건 군사 복무를 해야 한다. 그런데 여성중대를 없애고 나서 인민군대 내 여자 군인이 남아돌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여자도 군대에 가야만 대학에 갈 수 있으니까, 군대 가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이제는 여자고등중학교 학생 중에 군대 나가는 것이 최고로 잘되는 일이 되었다. 작년에 한 개 학교에서 군대 나갈 폰트(할당)를 2명밖에 안 주었다. 그렇다 보니 군사동원부(병무청)에 가면 부모들이 바글바글하다. 군대 복무 4년을 하고 나와야 대학을 갈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군대에 보내려고 아우성이다.
군사동원부(병무청) 사람들은 완전히 돈 버는데 횡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전에는 300달러면 군대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림없다.
여자든 남자든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갈 수 있도록 허용된 대학은 딱한 곳, 평양국방대학뿐이다. 그곳은 군사과학기술 수재 양성을 위한 곳으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갈 수 있다.
13년 군대 복무는 아직 도입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군부에서 이야기가 많았다. 10년 복무 생활하면서도 8~9년 정도 되면 오히려 새로 입대하는 병사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13년 군 복무를 하라고 하면 당연히 탈영자도 많이 생기고 군율도 해이해진다. 한마디로 망나니가 되는 게 뻔하다.
돌아가면서 여자들이나 건드리고, 도둑질하고, 오죽하면 군대를 북한에서 토벌대라고 부르겠는가. 이런 이유에서 무력부에서 13년 군복무제를 반대하는 것으로 안다. 현재 북한 군단보유량(군 병력)이 편제인원의 60%밖에 도달되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제대가 돌아오는 군인들이 그대로 제대되는 경우에는 인민군대 수가 굉장히 부족하다. 집단군의 병력을 10만으로 보고 일반군은 3만으로 보는데, 군단보유량의 60%밖에 안 되니까 당분간 제대를 줄이라는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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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지시인듯 합니다. 군인이 모자라니 여자도 군대가라… 그런데 여성 중대를 없애면서 여군은 남아돌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닐 남여 같이 지내다보면, 당연히 군내에 성폭력이 횡횡하게 될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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