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포래미안
당시 강서구 신월동이 1970년대 말에만 해도 논 밭 뿐인 서울의 농촌지역이었는데... 1980년대 초부터 연립주택이 우후죽순 들어 섭니다..
그래서 1980년에 신월국교에서 분교하여 강서국교를 설립 했는데... 전학, 입학하는 학생이 감당이 안되었었죠.
강서국교도 1983~1984년에 걸쳐 2번이나 인근 신축학교로 학생을 강제 전학을 보냈을정도 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강제 전학된 친구 만나러 인근 국교로 놀러가곤 했었습니다.
@독성지천안호랑이
한반에 학생 120명을 넘게 배정하다보니.. 책상과 의자(당시엔 걸상이라고 했죠)에 허리가 끼어서 나오기도 힘들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교단도 좁아지고. 교실 뒤쪽엔 아예 여유공간이 없었지요.
당시 강서국교엔 책상,의자가 올 프라스틱제질 이었는데.. 겨울철에 조개탄 난로를 때면,,, 근처에 있는 책상,의자의 플라스틱이 녹는 냄새가 나고,실제로 조금씩 녹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월동이 농촌지역에서 도시지역으로 개발 되고 있었고.. 또한 상습침수지역이라 타 서울지역보다 집값, 땅값이 저렴했지요..
1984년 서울 대홍수때 가장 심하게 침수된 지역입니다... 저와 저희 가족도 수장 될뻔 했었지요..
못살아서 완전 지하에 세 들어 살았을때 인데... 지하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 왔었습니다...
서울 상계동 신상계 국민학교.
15개 반이 있었고
반에 75명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
그리고 정식으로 입학 못한 아이들을 위한 공민반...이라고
학급 건물 뒤에 무허가 식으로 조그마한 건물에
1학년 부터 6학년 과정까지 한 20명 정도 모여서 선생님 두분이 가르쳤었죠.
1980년에 개교한 학교가 1983년하고 1984년인가 두번에 걸처 인근 신축 국교로 아이들 나눠서 강제 전학 시켰었지요.
아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 있었을정도 입니다
당시 강서구 신월동이 1970년대 말에만 해도 논 밭 뿐인 서울의 농촌지역이었는데... 1980년대 초부터 연립주택이 우후죽순 들어 섭니다..
그래서 1980년에 신월국교에서 분교하여 강서국교를 설립 했는데... 전학, 입학하는 학생이 감당이 안되었었죠.
강서국교도 1983~1984년에 걸쳐 2번이나 인근 신축학교로 학생을 강제 전학을 보냈을정도 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강제 전학된 친구 만나러 인근 국교로 놀러가곤 했었습니다.
한반에 학생 120명을 넘게 배정하다보니.. 책상과 의자(당시엔 걸상이라고 했죠)에 허리가 끼어서 나오기도 힘들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교단도 좁아지고. 교실 뒤쪽엔 아예 여유공간이 없었지요.
당시 강서국교엔 책상,의자가 올 프라스틱제질 이었는데.. 겨울철에 조개탄 난로를 때면,,, 근처에 있는 책상,의자의 플라스틱이 녹는 냄새가 나고,실제로 조금씩 녹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월동이 농촌지역에서 도시지역으로 개발 되고 있었고.. 또한 상습침수지역이라 타 서울지역보다 집값, 땅값이 저렴했지요..
1984년 서울 대홍수때 가장 심하게 침수된 지역입니다... 저와 저희 가족도 수장 될뻔 했었지요..
못살아서 완전 지하에 세 들어 살았을때 인데... 지하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 왔었습니다...
전학학갔는데
30여년만에 모교를 가봤더니 한학년이 한반으로 줄었고 인원이 7명......
전교생이 40명이 밖에 안되더군요 ...휴~
15개 반이 있었고
반에 75명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
그리고 정식으로 입학 못한 아이들을 위한 공민반...이라고
학급 건물 뒤에 무허가 식으로 조그마한 건물에
1학년 부터 6학년 과정까지 한 20명 정도 모여서 선생님 두분이 가르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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