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벼와 朴正熙대통령.
갑자기 통일벼이야기가 나오니까 좀 어리둥~하신가 보네요.
그렇지만 제가 하고져 하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에요.
물론 그때는 저 낳기도 전이니까 상세한 이야기는
못하겠지만....
60년대 후반에 박대통령의 重農정책이 시작 되었을 때
동네농꾼들은 전부 반신반의 했더랬다네요.
특히 우리동네같은 바닷가마을은 논자락이 빈약한데
통일벼를 심으라는 박대통령의 지시는 그렇게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였더래요.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한줄기에 80알이나 열리는 재래종벼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한 줄기에 200-250알의 이삭이 여는 통일벼를...
당시 우리아빠는 해남에서는 최초로 통일벼를 심었다네요.
(물론 아빠의 자랑담이지만)
그런데 그 해 가을 정말로 이삭이 여는데 보니까
한줄기에 220알씩 열려서 줄기가 넘어지고 난리를 쳤는데
당시 농사꾼들이 무슨 도깨비에 홀린줄 알았다네요.
하늘문이 열린줄 알았다네요.
그해 추수때 김제만경평야에 박대통령이 손수 벼베러 오셨는데
박대통령께서는 손수 나락을 따고 그것을 손바닥에 문지르셨다네요.
그리고 실제로 한알두알 세셨다는 것이네요.
한나두나에서...이백이십칠...이백이십팔...세는 박대통령의
이마에서는 초가을의 진땀이 소르륵 소르륵베이고 있던다네요.
이백서른너이를 센 박대통령께서는
"그러면 그렇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하고 파안대소를 하며 밀짚모자를 고쳐쓰시곤 막걸리 한사발을
주욱~들이켰다지요.
당시 비서관이던 한창某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면서 박대통령앞에
나타나서는
"각하 저는 280알짜리도 발견했읍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렸는데 그 순간 박대통령께서는 깜짝 놀라시며 술잔을
놓으시더래요.
"뭐이가 어때? 이백팔십알?"
"네, 제가 분명히 세었습니다"
"임자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이백팔십알이면
그게...."하고 말을 멈추시더니
"당장 그쪽으로 가 보자구"
하면서 일어서시는 것이였다네요.
그러니 일행이 문제의 논으로 우루루 몰려가게 되었는데
그 행차중에 박대통령께서는 이런 걱정을 하시더란 거에요.
"이 사람아,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벼 줄기가 부러진단 말이야! 이 사람아! 그 무게가 얼만데..?"
결국 문제의 논으로 가서 나락을 세어본것이지요
잘 영글기는 했는데 벼이삭이 이백팔십알까지는 아니고
이백이삼십으로 잘 영근것이지요.
비로소 안심을 한 박대통령께서는
"에이궁, 저 사람 저거. 아부를 해도 그렇지...
이백팔십이면 그 무게가 장정들 팔뚝하나의 무겐데..."
하고 혀를 차신거네요.
당시에도 이런 "정동이영이나 김근트에", 아니면
"신기느암" 같은 아부파가 있기는 있었나 보네요.
하여튼 그날 하루.
호남의 농꾼들 전부가 나서서 징치고 꽹가리치고...
그야말로 나랏님 오신 것 처럼 경사가 났다네요.
생각해 보세요.
같은 땅에 같은 농사를 지어도 수확이 3배라니
어찌 농사꾼들이 좋지 않겠어요?
당시에 아침저녁으로 감자만 먹어서 아랫배가 임산부만치
부풀러 오른 어린애들이 전국의 도처에서 보이던 시기였다지요.
그런아이들이 쌀밥을 먹기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라고 했어요.
이것이 박정희대통령의 농정치적의 제일과였네요.
당시 수원에 있었다는 농업대학과 농진청(농업진흥?)의 기록이
있네요.
흥.
못난 현대판 머저리 정치인들이야
친일파라고 매도하고 싶겠지요.
허나, 하늘과 국민은 진실을 아는 법.
아무리 깨구락지 뒷다리에 조청을 발라 놓아도
역사는 바로서지 않은다는 것이네요.
참 한심한 인간들.
요즈음 만생종들 처 먹는다고?
해태 명품쌀 처 먹는다고?
정말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것이 바로 통일벼네요.
김제만경평야에 누렇게 익어가는 통일벼를 내려다 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박대통령의 그 속마음.
이땅에 감자로 배를 체워 배불떼기 된 어린이들의 슬픈 모습이
없어지게 된 그 배경.
바로 박정희대통령이네요.
그분이 없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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