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JEEP)는 미국 험로 주행용차의 역사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의 발이었던 윌리스 지프에서부터 시작된 지프 브랜드는 현재 랭글러, 체로키, 그랜드 체로키 이렇게 3개 모델로 그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 윌리스 지프와 메커니즘적 연계성은 많지 않지만 지프처럼 역사와 전통을 지닌 4륜구동 모델을 탄다는 것은 여전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과거 크라이슬러 산하 브랜드였던 지프는 강인한 험로 주행용차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 크라이슬러는 미국차 중에서도 특히 품질이 나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지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크라이슬러는 2000년 독일의 다임러-벤츠 그룹과 합병(모양새만 합병일뿐 사실상 벤츠에 인수당했다)한 뒤 다임러-크라이슬러 그룹으로 거듭난다.
당시 크라이슬러를 회생시키기 위해 독일서 파견된 CEO 디터 제체(Dieter Zetsche·현재 메르세데스-벤츠 CEO이며, 내년 다임러-크라이슬러 그룹 전체 CEO가 될 예정)는 지프의 브랜드 가치에 주목해 이를 키우려고 노력했다. 디터 제체는 미국차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이 전통의 4륜구동차에 벤츠의 첨단 디젤엔진을 얹어 상품성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이번에 시승한 그랜드 체로키 3.0 CRD이다.
그랜드 체로키 구형은 차체가 높으면서도 날렵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 국내 SUV 운전자들 중에서도 꽤 선호도가 높았었다. 시승해본 신형의 경우 예전모델보다 차체 볼륨이 풍성하고 내외관 디자인의 낡은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모터쇼 컨셉트카를 보는 듯한 미래지향적 감각을 뽐낸다. 일급 호텔 입구에 세워놓아도 손색없는 자태다.
시승차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엔진이었다. 벤츠 중형세단 E320 CDI에 탑재돼 16만㎞를 쉬지 않고 평균시속 224.823㎞로 달렸다는 그 엔진을 달았다. 2987㏄ V6 DOHC, 최고출력 218마력, 1600rpm이라는 낮은 회전 수에서 최대토크 52.0㎏·m를 뿜어낸다.
공회전·저속주행 중 소음이 벤츠 디젤 세단만큼은 아니지만 꽤 정숙하다. 휘발유엔진 5ℓ급에 맞먹는 강력한 토크를 지닌 엔진과 5단변속기가 맞물려 공차중량 2.2t의 거구를 가볍게 밀어올린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9초 초반대에 끊을 만큼 빠르지만, 시속 150㎞ 부근부터 최고시속인 190㎞까지는 다소 힘겹게 올라간다.
공인연비가 리터당 9.5㎞인데 거의 근접하게 나온다. 5ℓ급 휘발유엔진의 파워를 내면서도 연료비는 국내 아반떼XD(휘발유)급 정도밖에 되지 않는 셈. 기름 많이 먹는 미국차에 대한 인식을 한 방에 날려버린다.
5인승인 실내공간은 현대 싼타페급보다 꽤 넓다. 운전석·조수석 모두 전동시트, 뒷좌석은 6:4 비율로 나눠 접을 수 있다. 최신경향을 따른 4륜구동시스템은 전자제어 방식으로 앞뒤 차축과 좌우 바퀴에 구동력을 배분한다. 전자식 자세제어장치(ESP)가 들어가 있어 유사시 차가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준다. 기어를 중립상태에 놓고 센터콘솔에 붙은 레버를 당기면 험로를 저속으로 주파할 때 유용한 로 모드로 바뀐다.
가격은 5790만원. 지프의 브랜드 가치, 신선한 디자인, 벤츠가 만든 고품질 디젤엔진 등을 감안할 때 구매가치는 높은 편이다. 독일 자동차 장인의 손길을 거친 지프가 다시 경쟁력 있는 SUV로 거듭나고 있다.
출처: 조선일보 편집부 최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