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구 시민들은 '안타 제조기' 박종호(31·삼성)가 자랑스럽다. 비록 박종호가 대구 토박이는 아니지만 이승엽(28·지바 롯데)이 떠난 빈자리를 메워주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하다.
37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한 박종호를 두고 대구 시민들의 칭찬은 그칠 날이 없다. "그놈아, 참 잘한데이. 쳤다하면 안타 아닌겨."
1973년 가난한 서울 봉천동에서 태어난 박종호는 이제 대구의 자랑거리가 됐다. 평범한 2루수에서 너무나 커버린 박종호. 부단한 노력과 땀으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진 박종호의 인생역정을 살펴본다.
▲고생하는 부모님 생각 이 악물고 야구
박종호는 사발면을 보면 어려웠던 시절이 생각난다. 박종호의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 아버지 박윤재씨(65)는 아파트 경비로, 어머니 최춘자씨(57)는 파출부로 일하면서 박종호를 키웠다.
박종호는 "같은반 친구들이 사발면을 먹을 때면 자리를 얼른 피했다.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참았다"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구암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박종호는 "야구선수로 성공해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고 싶었다. 지금 그 소원을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아 기쁘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박종호는 92년 성남고를 졸업한 뒤 성균관대 진학을 포기하고 LG에 입단했다. 박종호는 "돈이 필요했다. 대학에서 4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기가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결정이 옳았다"고 말했다. 계약금 1,200만원에 연봉 1,200만원을 받고 프로에 뛰어든 박종호는 아들을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돈을 모두 드렸다. 박종호는 2002년 조선희씨(31)와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타서 썼다.
▲부상으로 절망했던 LG시절
박종호는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강해져야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98년 박종호는 눈물을 흘렸다. 평생 뿌리를 내리고 싶었던 LG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된 직후였다.
93년부터 주전 2루수를 꿰찬 박종호는 앞길이 창창했다. 94년에는 데뷔 3년 만에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95년 손목 골절을 당해 침체의 늪에 빠진 박종호는 설상가상으로 재기를 노리던 97년 일본 스프링캠프에서 발목 인대를 다쳤다.
98년 7월31일 이적 소식을 들은 박종호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복도 지지리 없는 놈이라며 스스로 자책했다. 그렇다고 야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짐을 싸면서 '여기서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의학적으로 재기 불가 판정을 받고 LG로부터 버림을 받은 박종호는 피나는 훈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쏘나타에서 BMW로 바꿨다
박종호는 현대로 이적한 뒤 99년에 처음으로 타율 3할 고지를 넘고, 2000년에는 타격왕에 올랐다. 그야말로 전화위복이었다.
96년 박종호는 큰맘먹고 현대 쏘나타 승용차를 구입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2003년 12월 애마를 바꿨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뒤 삼성으로부터 4년간 22억원이라는 거액을 받은 뒤였다.
박종호는 "팬들이 외제차를 탄다고 색안경을 끼고 볼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내가 성공한 뒤 꼭 타보고 싶은 차였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박종호는 스스로 삼성맨이라고 자부한다. 대구에서 야구 인생의 꽃을 피운 박종호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삼성 어린이 회원이었다. 내 가치를 인정하고 제대로 평가해 준 삼성에서 4년 뒤에 다시 뛸 수 있도록 하겠다. 나는 욕심이 많은 선수다"고 말했다.
출처: 굿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