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울산 거주중인 27살 청년입니다.
일단 보배드림에 이렇게 그저 제 이야기를 쓰는거에있어 방탈이라면 죄송합니다.
보배드림이 아무래도 많은 커뮤니티 사이에 연령대가 좀 높고 남성분들이 많다보니 찾게돼었습니다.
그냥 아무에게도 털어 놓은적 없는 제 이야기를 한번 써보려 합니다.
꼭 한번 제 얘기를 써보고 싶었는데 말로 터놓긴 힘들고 이렇게 써봅니다.
글이 길어질 수 있기에 바쁘시다면 뒤로가기 해주시고 안읽어 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94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저희 집은 꾀나 중산층에 속했으며 2살위의 형과 기억상으로 전원주택의 아버지는 제조업을 운영하셨습니다.
집안 자체도 나름 중산층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도 재산이 어느정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입니다. 제가 3살, 저의 형이 5살이 되던 97년도에 어머니가 집의 모든재산을 들고 사라집니다.
물론 저는 아무 기억도 없어요.. 현재까지도 어머님이 누군지 살아는 있는지, 이름, 얼굴 아무것도 모른채 그냥 살아갑니다.
그렇게 어머님이란 사람이 아버지와 저, 형을 버리고 사라지게돼었고 아버지는 큰 충격에 제조업고 운영을 하는둥마는둥하시면서
여기저기 어머님을 찾으러 다니십니다. 그 동안 경남 지방은 모두 돌아다니며 이사를 다녔었습니다. 부산, 대구, 영천, 양산 등 시도때도없이 이사 했었었죠ㅎ 그렇게 3년이 흘러 더이상 어머님은 찾을수없고 (처가도 모른다고만 했다하네요) 아버지는 결국 운영하시던 제조업마저 부도가 나십니다. 그 상황에 어린 저와 형이 뭘 알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에는 아버지도 이기지 못하시고 저와 형을 보육원에 보내시려하셨습니다. 그때 삼촌과 숙모가 애들 보육원보내지말고 그냥 조금 식비정도만 매달 양육비로 보내주고 나한테 맡겨라고 말씀하십니다. 삼촌과 숙모는 제 또래의 딸 한명과 2살아래의 딸이 있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삼촌과 숙모는 저희를 불쌍하게 여기셨는지 저희를 거둬주셨고 저는 그렇게 삼촌과 숙모댁에서 초등학교입학을 포함 7년정도 함께 살게됩니다.
그 7년동안 방학에는 할머니댁에 보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는데 정말 엄청난 깡촌입니다 청도라고 시내에서 엄청 떨어진 작은 20세대 정도의 마을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 당시에는 엄청 싫고 아무것도 없어서 형이랑 잠자리나잡고 송사리잡고 그렇게 놀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은 추억이고 시골의 맛을 알게해준 시기였죠 오히려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 편했고 삼촌 숙모는 친절하셨지만 아무리어려도 알건 다아는지 무엇하나 떼쓰거나 사달라거나 할수없는 사촌들이 원해야만 할 수 있는 눈치밥만 먹던 신세였죠
그러다 초5 겨울방학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형이 큰 사고를 치는바람에 삼촌과 숙모는 이제 더이상 못키우겠다하여 저와 형은 한순간 아버지 곁으로 보내지게됩니다. 아버지는 울산에 거주중이셨고 저희는 영천에 살고있던지라 그 늦은밤에 형과 둘이 고속버스타고 울산으로 내려갑니다. 아버지와는 설이나 추석, 1년에 한 두번 정도 볼수있었고 엄청 서먹한사이였습니다. 예상도 못했던 한순간에 아버지곁으로 보내지니 적응이 안됐는데 아버지는 모르는 아주머니랑 동거중이셨습니다. 새어머니라고 정식으로 소개하시진 못하셨지만 눈치밥 7년인지라 보자마자 알건 다 알게 되더군요ㅋ 그 당시만해도 아버지는 또 자리를 어느정도 잡으신 상태셨습니다. 새롭게 제조업을 다시 운영하셨던 상태였죠 그렇게 1년 6학년 연말쯤입니다. 아버지는 또 한번 뒤통수를 맡게됩니다. 그 당시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그 아주머니가 아버지를 꼬셔 담보를 잡게 하셨고 (서론에 말씀드렸듯이 집안의 할머니 할아버지 재산으로 청도에 땅과 집이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 재산입니다) 아버지는 잘 못 써준 담보에 할머니 할아버지 땅과 집은 모두 경매로 넘어가게됐습니다. (또 알고보니 그 땅과 집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와 형을 유독 예뻐하시고 불쌍하셨는지 저와 형을 주려고 했었다하셨습니다) 근데 그 나이에 그런건 관심이없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었죠
그렇게 이제 초6 연말 저와 형, 아버지 셋이 작은 월세방을 얻어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다시는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겠다 말씀하셨지만 중1 여름 다시 새로운 아주머니를 집에 들이십니다.
아버지가 그렇다면 그 뜻을 따라주는게 맞다 싶어 저는 동의를했고 절대 한번도 정을 주거나 한적은 없습니다.
제 인생에 어머님이란 사람은 그냥 없다생각하는게 맞았고 그 누구도 이용만할뿐 어머님이란 존재가 어떤건지 저는 모르고 살아왔기때문에 솔직히 있다 없으면 모르겠는데 거의 태어날때부터 어머님이 없다보니 빈자리를 잘 못느꼈습니다 친구집을 놀러가거나 잘때 친구들이 엄마에게 하는 행동들을 보고 부럽고 나도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이면 좋겠다 생각은 많이 했지만 그럴 수 없는걸 알기때문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아버지를 원망한적은 한번도없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매우 가부장적이신 아버지인지라 저와 형은 아버지와 솔직히 얘기를 하거나 하질않습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포항공대를 졸업하시며 대학에대한 자부심이 강하셨고 저와 형에게 공부를 항상 강요했었습니다. 근데 저희는 공부와는 거리가멀었고 집안에 돈도 없었기때문에 학원을 갈 형편도 아니였습니다. 평범한 부모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친구들은 제가 아버지와 싸우거나 할때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한테 왜그러냐, 니가 이해가안간다, 등등 이건 격어보지않으면 정말 모릅니다.. 남들은 부모한테 잘하라고 잘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솔직히 성인이되기까지 단한번도 무엇하나 지원받은게 없습니다. 용돈이 일주일 1만원인데 그게 버스비 포함이였죠 그당시 주6일 or 놀토 일때 학교 버스비 내면 불량식품 100원사먹는것도 힘들 정도였었습니다. 그리고 옷이나 신발, 단 한번도 사주신적이 없습니다. 겨울에 친구들이 패딩을 입을때 저는 제가 산 후드집업입으며 떨어야했고 친구가 신던 메이커신발 이제 안신는다고 제가 3천원주고 사서 2년동안 신고 그랬었습니다. 암튼 그렇게 아버지와는 가족이긴하나 서로 투자 없이 바라는거없이 살자고 생각했습니다. 절대 원망한적없고 남들과 비교한적없고 그저 빚만 남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제돈은 제가벌어서 쓰고 (학생이 어떻게 돈을버냐 할수있는데 야자를 안했기때문에 학교마치고 7시부터 10시까지 알바를했고 나쁜짓이지만 토토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습니다.. 5천원에 4배 맞춰서 2만원 이런식이였죠) 그렇게 성인이됩니다.
성인이되고 부터는 그냥.. 일만합니다ㅎ
안해본일이 없다할만큼 아르바이트라면 다 했습니다. 그렇게 고딩때 못냈던(폰이 한 2년없었어요 요금을 못내서 정지 당함) 폰요금과 치료받지 못했던 치과치료나 군대가기전에 그런것들을 다 정리하고 가고싶어서 (빚지는걸 굉장히 싫어했었습니다) 버는 족족 다 쓰고 21살 11월에 군대를 갑니다.
그렇게 전역하고 일자리를 구합니다. 문제는 이제 여기서 부터인데, 앞서 말했듯 어릴때부터 아버지에게 받은 지원이나 이런건 없다보시면됩니다 오직 자수성가해야만하고 안그럼 그냥 가난의 대물림은 정해진거였죠. 여튼 아버지는 제가 일을하기 시작할때쯤부터 운영하시던 제조업이 잘 안되기시작합니다. 원래도 잘 안되긴하셨고 매번 뒤통수만 맞았습니다. 아들에겐 엄하시고 남에겐 쉽게말하면 호구였죠 술만마시면 아주... 그렇게 현대중공업이 휘청거리기 시작하고 저희 아버지도 함께 문을 닫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로 일을 안하십니다. 중1 때부터 같이 살던 아주머니는 10년을 거의 같이 사셨지만 아버지께서 나몰라라하며 일도안하고 매일같이 술과 담배만 찾으시니 그렇게 2년을 버티다 집을 나가십니다. 제 명의로 아주머니와 아버지가 휴대폰을 쓰셧는데 소액결제 3개월 90만원하고 요금안내고 집 나갔네요 하... 총 119만원 정도였는데 그것도 제가내고 휴대폰 해지해버렸습니다. 아주머니와 아버지는 일을하는 저와 형에게 매번 돈을 부탁하기 일수였고 저는 절대 일체 돈을 보태주지않았습니다. 그런데 형은 매번 돈을 보내줍니다. 사고를 쳐서 일찍 결혼을해버려 두명의 자식이있고 그렇다할 수입이 많지도않은데 돈을 보내주고 저는 형과 그렇게 또 많이 싸웠었죠 지금이야 형도 더이상의 지원은 해주지않습니다. 째뜬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가고 일은 절대 안하시려하고 저는 그렇게 집을 나와 혼자 살아갑니다. 아버지께서 연락이 올때는 그저 돈이필요할때, 또는 갑자기 어디가 아파져서 병원을가야할때, 술먹고, 이렇습니다.
글쓰는 요령이 없어서 쓰면서도 제가 너무 두서없이 쓴글이 많을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죄송합니다ㅜ
저는 지금 지금껏 조금 모은 돈과 은행 대출로 작은 매장을 하나 오픈했습니다. 어떻게든 성공하자는 생각에 쉬지않고 달려왔고 이제야 작지만 내 매장까지 가졌는데 너무 힘이듭니다.. 2월 1일에 오픈을했는데 2월 초중순 신천지로인해 코로나가 크게 터져버리고 매출은 현재 가게 월세, 관리비 등 빼고나면 남는게 없네요.. 물론 버티고있고 버틸겁니다 근데 요즘 제가 잘하고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눈물안흘리고 강하게 살아왔고 왠만한일에는 무덤덤할만큼 글에 정리를 못했지만 강하게 살아왔습니다. 요즘은 친구도 안만나고 연애도안하고 아무것도 안하고 일과 집이 끝입니다. 매장에서도 혼자, 집에서도 혼자, 손님은없고 친구도 없고 연애는 당장 먹고살기도 힘들어 엄두가 안납니다. 근데 요즘 이게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진짜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원망하고 부모탓하고 그런적없는데 너무 힘들고 원망스럽고 오래된 친구들보면 저만빼고 다 잘먹고 잘사는데 일안하는 애들도 부모잘만나서 그냥 집에서 놀고 부모가 취직시켜주고 옆에서 보면 나만 왜 이렇게 힘든가 원망스럽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노력하지 않았거나 나쁜쪽으로 빠졌다면 저는 할말없습니다. 그치만 저는 또래의 그 누구보다 노력했고 많은걸 포기해야 기본적인걸 얻을수있기때문에 남들의 당연한건 모두 포기하고 기본만을 유지하는것도 힘들어 정말 쉬지않고 일하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이제 27이 돼었고 혼자 살며 이제 제 매장을 꾸려 저의 길을 걸어갑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가 다 하고 남에게 도움은 못주더라고 피해는 주지않고 살았어요 이게 제가 살아왔던 방식인데 이제 나도 결혼을 준비하고 조금있으면 30인데 작은 전세집하나 없을생각하니 막막합니다.
근데 두렵지는 않습니다 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 근데 아버지가 또 제 발몫을 붙잡습니다.
저는 사실 나는 가족이없다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머님, 매일 술과 담배에찌든 가장의 모습은 사라진 아버지
형은 저와 똑같기때문에 서로 먹고살기힘들어 솔직히 중학생이후 크게 서로 터치없이 살았습니다.
여튼 그렇게 살아왔는데 아주머니는 제 휴대폰 명의 119만원 날라먹고 연락은 없으시고(상관은없습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돈만찾습니다. 얼마전에 백내장이오셨는데 형이 아버지 백내장을 시켜주자 하더군요
저와 형 아버지는 보험이라곤 없습니다. 저도 아직까지 27이지만 작은 실비보험하나 없습니다. 백내장이 100만원정도 하는 싼걸로했는데 형과 저반반 내서 그냥 해드렸습니다. 항상 아버지가 전화로 돈을 요구할때면 나는 아빠한테 그 무엇도 바라는거없고 바란적없다 그러니 나한테도 제발 바라지마라 그 무엇도 바라지마라 말했습니다. 근데 막상 또 아프시고하니 마음 약해져 저렴한 렌즈지만 수술을 시켜드렸고 앞으로 또 더 아파지실걸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네요 하..
정리를 해야겠네요
아버지는 매일 술과 담배만 찾으시고 저와 형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작은 월세방에 혼자 사시며 그 돈은 그래도 10년넘게 같이사신 아주머니가 매달 내주십니다.
아버지는 죽으면 죽지뭐라는 생각으로 일도안하시고 아무노력도 안하십니다.
나이가 64년생이신데 나이도 나이이신지라 이제 아파오는곳이 더 많아지구요
저는 가족들과 연을 끊고 살아가지만 한편으론 아버지가 불쌍하기도 합니다. 술을먹고 아버지얘기를하면 왜인지 슬프고 눈물만 나는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인가봅니다.
그치만 저는 남들 술먹고 놀때 일을했고 연애도 여행도 모두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그 흔한 제주도 여행 한번 가본적없고 비행기는 커녕 가족여행은 있을수도 없는일이였죠
저는 근데 다 포기해도 돼요 연애, 여행, 취미, 친구들과 술 등 다 포기하고 살았지만 앞으로도 포기해도 괜찮고 제가 성공해서 제 가정을 꾸려서 정말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고싶습니다 그냥 그떄의 제 가족만 바라보고 이렇게 살아가는데 현재의 아버지와 얽힌다면 저는 그 무엇하나 발전없이 그냥 이대로 나이만 먹게되고 모은돈은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갈까 너무 두렵습니다
20대 초반 군 전역하고 무엇이든 할것같았지만 27이되니 막상 30에 가까워지니 걱정만 앞섭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하면좋을지 아버지와의 관계 보배드림 회원님들이 보기에 제가 살아온 인생이 앞으로의 제 인생이 아버지에게 있어 제가 불효인지 (남들은 그저 제가 아버지에게 하는 것만보고 불효라합니다) 끝까지 아버지와 함께 가야할지 아니면 아버지가 아프시든 뭐든 무시하고 제인생을 살아가야할지 고민입니다. 아버지를 돕고 제가 지원을 해드려도됩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솔직히 결혼을 할수있을지 제대로된 생활이나 할지 고민이고 아버지와 연을끊으면 솔직히 나하나 먹고사는건 어려운게 아니라 제가 편한길은 후자이긴합니다. 사실 제 마음도 후자이긴해요 너무 불효인가요?
그리구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니 친어머니가 올라와있는데 보통 사망했으면 가족관계증명서에 사망이라고 써져있지않나요?
얼마전 가족관계증명서 땠다가 그사람 이름이있는걸보고 27년만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게되었네요ㅋ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19 모두 다 함께 이겨내는 날이 빨리왔으면 좋겠네요
정말정말 두서없이 써내려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신차리라 형아.
힘내세여. ㅊㅊ
저도 가족관계증명서 때면 전처가 삭제가 안됀채로 나옵니다
힘내셔요
저런 부분때문에 한부모 가정이라던가 그런 복지혜택은 하나도 못받고 하..
가출 하신거면 어지간 해서는 알아보기 힘듭니다 실종신고뒤 5년이상 확인이 안돼면 사망신고가 가능한걸로 알고 있는데 확인 해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그리구 너무 고생하셔서 어찌말을못하겠네요.
조심스레 말씀드리는데..
그래도 아버진 아버지니..
암튼 힘내세요
지금아바지는 엿추억에 빠져 포기한 삶을살아가는것처럼느껴지시고요.
혼자어렵게 사시는데 장사란 신용같아요.
무엇을하시는지 모르지만 고객이원하는걸 꾸준히 찾으시고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란 솔직히 표현이 없던시절을 살았던것같아요.
기억나는것 외에 어렸을적 모든것을 다해주고 싶었던게 아버지라 생각해요.
서로대화가 많이 없다하여도 아버지는.
자식생각 많이 할꺼여요. 맨정신일때는요
아버지에게 저희도 힘들고 아버지도 일을찾아보시라고 속시원한대화가 필요해보입니다.
우선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는 보건소나 그런데를
데리고 가보셔요.
희망에끈을 버리시지 마시고
차근차근 버티시고 나가시기를 힘내세요.
부모님은 마음 독하게 잡수시고 멀리하세요 ~
가난이 대물림 되서는 안되니 힘들어도 본인만 보시길 ~
나도 지지리 불쌍한 학창시절보냈어!
산밑에쓰러져가는?이제100년됫더라고 그런집에서 고딩시절보냈어!!문열면그냥 자연이야 하하하
뜨거운물?아냐 겨울에 찬물로 머리감았어!!
슴초반에 대출내서 쪼꼬만내매장에서 시작했어!!!
지금 졸라그런데...힘내자 ㅋㅋㅋㅋ대구냐?술한잔하까 ㅎㅎ
88년도로 기억 울산으로 이사를 왔죠. 아버진 일을 하셨지만. 술,담배 생활비(빛)로 저축없는 하루살이로 삶을 살았고...저는 중1부터 신문배달,당구장 알바,치킨배달 등 인생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어요. 아직도 저에게 충격으로 남아 있는건...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고향에서 울산으로 같이 이사온 친구분 집에 돈을 빌려오라고 했던 기억 근데 그집 아들이 저와 친구였는데...수치심이 ㅠ.ㅠ 그리고 6학년 수학여행전 입을 옷이 없었는데 속옷 집에서 잠옷인지 모르고 산 옷이 잠옷인걸 안 친구들이 놀렸던 기억.트라우마 처럼 아직도 남아 있네요. 당시 등록금주면 가던 대학도 돈 없다며 안 보내 주데요.
아버지 술과 담배로 인해 제가 입대하기전 00년즈음 뇌경색으로 인해 시작된 저의 인생은 20년 지난 현재도 제 삶을 조금 힘들게 하는건 현실인거 같습니다. 제대 후 같이 동거중이던 아주머니와 강제 별거 후... 아주머니도 애가 둘이라 제가 돈 버는 족족 허공으로 날아갈걸 알기에 강제 별거를 했죠. 반신불구이신 아버지란분도 그 아주머니가 모실께 아닌걸 알기에...
제대 후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삶 한달벌어 가구사고...가전사는 재미로 살다...지금의 아내를 만났지요. 우리 애들2 아내 너무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뿐이네요.
동생이 아버지 명의로 대출 받은게 못 갚아서 터지고...저한테도 금융관련 터지고... 이 일로 동생과는 연락단절 그돈은 제가 일부 갚았지만 아버지 명의 돈이 압류로 인해 저희집 압류 엉망진창 인생이 그리 흘렀어요.
아내가 돈 좀 모으면 아버지 어디 아프고... 돈 나가고... 우울증와서 자살한다고 난리고...
동사무소,경찰관에게 자식 도리 안 한다고 난리고... 저도 그리 산답니다.
현재는 애들이 커버린 이유와 과도한 빛독촉으로 인해 따로 모시고 있지습니다. 아내도 이제서야 숨 좀 쉬고 살아요.
근데 이틀전 이빨아파 못 살겠다며 돈 달라네요.
이건 뭐...희안하게도 사고친 동생놈한테는 돈 달라고 연락 잘 안하네요. 미치죠...
저도 작년엔 자살한다고 소동 부렸을때 경찰관에게 부양의무 포기하고 싶다고...눈물 안나오는 눈물을 흘렸었습니다. ㅠ.
많이 웃으시고...흔한말이지만 한번사는 인생 좋은일만 생겨도 부족한데 인생이 안그런가봐요.
행복한 삶을 누리세요. 부모! 서기님과 저에겐 조금 다른 느낌의 단어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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