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조끼를 입은 조합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비장함이 넘친다. 중앙방송을 통해 `노동가요'가 울려 퍼지고 있지만 공장 주변은 썰렁하기만 하다.
면적 151만평, 조합원 2만7400여명.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개점휴업 상태였다. 소형차부터 준중형, 대형승용차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차량을 연간 180만대 뽑아내던 공장은 제 기능을 잃었다.
파업 나흘째인 30일 아침, 울산공장은 파업 현수막 문구로 어지럽다. `단결'과 `투쟁'으로 시작되는 문구들은 `쟁취'만을 말하고 있다. 아직도 1970~80년대 투쟁양상에서 변한 게 없다. 공장(라인) 단위의 애로사항을 중구난방식으로 내건 현수막도 보인다. 글로벌 기업을 향해 숨가쁘게 달리고 있는 현대차의 공장이라기엔 너무 낯설다.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 수준과 마찬가지인 원색적 문구들로 뒤덮여 있다.
11년 연속 파업이다. "연례행사 아입니꺼…. 그래도 올해는 나은 편이지예." 안내를 맡은 회사측 직원 역시 `치부'를 들킨 듯 머쓱한 표정이다. 매년 반복되는 파업에 이골이 났다는 투다.
1995년을 제외하면 18년간 노사는 매년 파업을 통해 `대화'해 왔다. 현대차 노사는 파업이 서로의 의사소통을 위한 매개체가 됐다는 비아냥마저 들린다.
◇ "우리에겐 가정을 " vs "회사가 자선단체인가"〓올 현대차 노사협상의 주요쟁점은 △해외현지공장 신설과 신차종 투입시 노사간 심의의결 △신기술 도입 및 외주화 관련, 고용관계 사항의 노사 심의의결 △당기 순익의 30% 성과 배분 요구 △주간 연속 2교대 관련, 2008년 4월1일부터 교대근무제로의 변경 등이다.
이중 노조는 최대 핵심현안으로 주간 연속 2교대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회사측은 이에 대해 "노조가 임금 삭감과 노동생산성의 변화없이 근무형태 변경만을 요구하고 있다"며 "주간 2교대제로 바꾸면 근무시간이 20% 이상 단축돼 생산량이 줄어들어 이 분량 만큼 생산성을 향상시키거나 임금을 삭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회사도 노조의 요구를 장기적으로 들어주고 싶지만 당장은 어려운 만큼 단계적인 실시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측은 노조의 요구를 다 들어줄 경우 근무시간이 심야시간대에만 4시간이 줄어이를 위해 고용을 한꺼번에 늘려야 해 이중고를 겪게 된다고 지적했다.
회사관계자는 "지난 29일 노조 요구안중 근골격계질환 관련 사항을 회사가 합의한 것도 근로자들의 건강을 회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이라며 "노조의 요구가 곧바로 시행되면 회사와 노조가 둘다 경쟁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염려했다.
◇통제불능 파업은 필수(?)=노사는 30일 제19차 교섭을 진행했지만 중요 안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각차를 드러내며 파업 장기화를 예고했다.
노사는 핵심안건에서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 특히 임금 및 상여금 인상, 성과급 추가 확대, 주간 연속 2교대제 도입 등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협의조차 벌이지 못하고 있다.
이상욱 노조위원장은 30일 협상결렬 후 회사가 제시안을 내놓지 않는 등 교섭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단식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주변에선 "올해도 또 생떼쓰기냐"라는 비난의 소리도 만만치 않다.
매번 무리한 요구를 던져놓고 회사가 들어주지 않을 경우 삭발투쟁, 혹은 단식투쟁을 벌여 여론의 동정을 얻으려 한다는 것. 80, 90년대식 파업현장을 그대로 답습한 모습이다.
노사는 연례행사가 돼버린 파업이 `신뢰부족' 때문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회사측 관계자는 "현대차 노조는 한국의 대표적 강성노조로 전환배치조차 어렵다는 점에서 통제불가능한 상태"라며 "주력 생산 차량이 바뀌면 경영효율을 위해 전환배치해야 하지만 이 또한 노조로 인해 어려워 경쟁력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노조가 문제삼고 있는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등도 노조원들이 전환배치를 거부한 자리를 비정규직으로밖에 채울 수 없던 회사의 사정이 만들어낸 촌극"이라고 설명했다.
노조원 중 일부는 한 공장에 적응되면 도무지 업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노조는 오히려 생산차량을 바꾸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며 "`투싼'의 시장 투입이 늦어진 이유도 9개월 간 노조와 장기간 `협의'를 하느라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이 절보고 나가라는 식'이라고 비유했다.
그러나 장규호 노조 공보실장은 "임단협에서 약속된 사항들이 파업복귀 이후 다음 임단협 기간까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며 "회사측이 파업만 넘기자는 식으로 노조의 주장을 대하는 것이 노사 간 신뢰를 깨뜨리고 있다"고 반론했다.
◇파업의 파편=노조는 30일 오전 10시부터 `투쟁보고대회'라는 기치를 내걸고 본관 앞 광장에서 집회를 벌였다. 그러나 한편에서 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눈에 띈다. 22일째 울산공장 본관정문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최남국 의장(36) 외 `98현자복직투쟁위'에 소속된 28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1998년 현대차가 구조조정을 통해 퇴직시킨 인원 중 일부다.
최 의장은 "98년 당시 300여억원의 적자가 나자 회사는 희망퇴직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해고'를 단행했다"며 "회사는 경영정상화가 이뤄지면 우리를 우선 복직하겠다고 4대 일간지에 광고까지 냈지만 아직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회사측은 "회사가 성장하자 여기저기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며 "노조의 요구도 무리한데 희망퇴직자와 하청업체 직원들까지 몰려와 집회를 벌여 곤혹스럽다"고 밝혔다.
"같은 노동자지만 수백개에 이르는 하청업체 직원들의 사정을 우리가 다 대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장규호 현대차 노조 대변인도 양극화가 대기업 노동자의 `희생'과 `인내'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강변했다.
대기업과 노조, 해직자와 폐업한 하청업체 직원들이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땅 노사관계의 암울함과 서글픔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