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수가 차근차근 설명하자 모두 한시름 덜었다는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구보다 가장 기뻐해야할 사람은 동팔이였지만 그는 긴장하느라 기운을 다 써버린듯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자정을 알리는 자명종 소리가 여상스럽게 온 산장을 메아리치자 기뻐하던것도 잠시.
다시 두번째 미션이 시작 되었다는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에요! 제 방에 메모가 있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들 복도로 나왔고 그곳에는 상훈이 메모지를 든채 서있었다.
그의 손바닥위에 얌전히 올려진 하늘색 메모지는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 접했을때와는
전혀 다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무서운건 자신이 정답자가 되는것이 아니다. 정답자는 최소한 목숨을 보장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두려운것은 정답자에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상훈을 비롯한 사람들이 메모를 집어들기를 꺼리자 자신의 차례가 지난 동팔이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메모지를 펼쳐들고 큰 소리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장의 비밀. 제 2 장*
두번째 주인공은 김 상훈 님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본인의 이름을 확인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동반자로는 김 진주 님이 선택되었습니다.
김 상훈 님이 정답을 맞추지 못할 경우 김 진주 님께서는 12시간 안에 살해당하게 될것입니다.
참고하시고 최선을 다해 미션을 수행해 주십시오.
*Mision = 거실에 놓여있는 네 가지의 상자를 순서대로 열고 물건의 이름을 맞춰라.
상자는 가로 12cm / 세로 12 cm 의 정육면체로 청색/흰색/검정색/적색 으로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상자들은 모두 잠겨있으며 열수 있는 열쇠는 각각 다릅니다.
그중 열쇠 하나는 산장 어딘가에 숨겨져 있으며 그것이 첫번째 상자의 열쇠입니다.
상자를 개봉하게되면 그 안에는 다음 상자를 열수있는 열쇠가 들어있고 마지막 상자에는
미션의 정답인 물건이 들어있습니다. 그 물건의 이름을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Hint = 1. 각 상자의 열쇠가 모두 다르고 열쇠는 일회용이기 때문에 한번 열쇠구멍에 들어가면
두번다시 사용할수 없습니다. 참고하십시오.
2. 첫번째 열쇠 - 이것은 모두를 지켜주는 결계인 동시에 구속하는 사슬입니다.
3. 상자의 순서 - 첫번째 상자 : 세계 4대 종교
두번째 상자 : 세계 4대 뮤지컬
세번째 상자 : 세계 4대 문명
네번째 상자 : 세계 4대 살인마
정답 제출 시간은 오후 11시 30분 부터 30분간입니다. 그 전에는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세한 힌트와 설명을 드렸으니 충분히 좋은 결과가 있을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Master H-
"하하.. 기가차서 말도 안나오네.. 저런 밑도 끝도 없는 문제를 맞추라구?"
메모를 읽던 동팔은 기가 막혀 너털웃음이 났다. 그건 그뿐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진주는 자신의 이름이 죽음의 명단에 오르자 아연실색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료가 메모지를 받아들고 자세히 읽는가 싶더니 통 이해를 못하겠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른건 대충 알겠는데 열쇠 부분이 잘 이해가 안되요. 누가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료형. 제가 알아듣기 쉽게 말해드릴께요."
시종일관 준수의 옆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던 준호가 료의 곁으로 다가가 시선을 맞추고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역시 글을 읽는것 보다는 말로 듣는게 이해하기 편했다.
"상자를 색으로 구분하는건 헷갈리니까 숫자로 설명해볼께요."
"좋아. 편한대로 해."
"1 / 2 / 3 / 4 번의 상자가 있어요. 우리가 그 상자를 가지고 해야 할일은 상자의 순서를 맞추고
열쇠로 여는거죠. 순서대로 열지 않으면 열수 없게끔 만들어 놓은것 같아요.
우선 첫번째 열쇠가 있어야 시작할수 있겠죠? 상자가 4개 다 잠겨있으니까요.
산장 어딘가에 열쇠 하나가 숨겨져 있는 모양이에요. 물론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몰라요.
그 열쇠를 찾아 손에 넣으면 힌트를 풀어서 그 열쇠에 맞는 첫번째 상자를 찾아 내야해요.
첫번째 상자를 열면 그 안에 두번째 상자를 열수 있는 열쇠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두번째 상자를 열면 세번째 상자의 열쇠가 있고, 세번째 상자를 열면 네번째 상자의 열쇠가 있고..
네번째 상자를 열면 정답을 맞출수 있는 물건 같은게 들어있다는 말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한가지만 더."
"뭔데요?"
"상자의 힌트같은거 필요없이 이것저것 다 열어보면 그중 하나는 열릴것 아냐?"
"힌트를 제대로 안들으셨군요? 열쇠는 한번밖에 사용할수 없데요. 열쇠구멍에 들어가면 망가지나봐요.
즉! 정확한 상자를 골라 한번에 열지 않으면 그대로 게임 오버라는 말이죠."
"정말 무서운 미션이군.."
"그러게요."
"그나저나 준호군. 상자의 힌트가 뭐라고 했지?"
"1번 상자는 세계 4대 종교, 2번은 4대 뮤지컬, 3번은 4대 문명, 4번은 4대 살인마였어요. 왜요?"
"너.. 한번듣고 이걸 다 외운거야?"
"네."
"내가 보기엔 한국말 잘하는 나보다 한번보면 모든걸 외워버리는 너의 머리가 더 대단하다.
식당 그림 그릴때도 느꼈지만 너처럼 기억력 좋은 사람은 처음봐."
료는 준호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들이 보기엔 머리 좋은 아이를 칭찬하는 손짓으로 보였지만 준호는 느낄수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료의 손에는 알게 모르게 강한 힘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밤을 샐순 없잖아요. 잠깐 눈이라도 붙인뒤에 상의하는게 어떨까요?"
"저도 동감이에요. 오늘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피곤해 죽겠네요."
자신이 살인 명단에 오르자 사람들을 들들 볶아가며 안달을 하던 동팔과는 달리 침착한 태도로
쉴것을 권하는 진주와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내두르던 사람들은 아침에 다시 의논하기로 결정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형. 안자요?"
준수가 방으로 돌아오자 마자 말없이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자
준호가 등 뒤에서 목을 끌어 안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준수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끌어 침대로 데리고 갔다.
"빨리 자둬. 그래야 아침 일찍 일어나 문제풀지."
"형이야말로 주무세요. 얼굴이 까칠해보여요."
"신경을 많이 썼더니 그런가보다."
"오늘 멋있었어요."
"응?"
"답을 맞추던 형. 정말 멋졌어요. 최고에요~"
"갑자기 왜 그래? 쑥스럽게.."
"사실인걸요?"
"네가 자세히 기억하고 말해줘서 많은 도움이 됬어. 그리고 안좋은 일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정답이 떠오른거니까."
"저 때문에요?"
"그래. 보통 남자는 여자를 원하는게 정상이잖아? 그런데도 동팔씨가 너를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인걸 보고 문득 떠올랐어. 상식을 뒤집어 반대로 생각하라는것이 아닐까 하고.."
"아.. 그래서 식탁에 없는 무언가를 떠올린 거구나.."
"그런 셈이지."
준호는 엎드린 자세로 준수를 내려다 보며 씨익 웃었다.
준수는 팔을 들어 그의 머릿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준호는 아프다며 엄살을 떨었다.
"그나저나 오늘 미션은 너무 복잡한것 같아요."
"그건 그래. 특히 세계 4대로 시작하는 힌트에서 질려버렸다니까?"
"그렇게 말해도 형은 미션에 대해서 강한 흥미를 가지고 있죠?"
"아무래도 어려울수록 자극적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맞추라는거야? 아는것이라고 해봤자
4대 문명이나 종교정도? 컴퓨터라도 쓸수 있으면 좀더 수월할텐데 말야."
"너무 걱정마세요. 이래뵈도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5기 멤버라구요. 잘해낼수 있을거에요."
"그래. 잘될거야. 어서 자자."
"네. 좋은꿈꿔요."
준호는 전날 잠들기 전에 했던것처럼 준수의 뺨에 입을 맞춘뒤 바로 돌아누웠다.
그러자 준수는 몸을 일으켜 준호의 얼굴을 감싸쥐고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자기 전 키스는 뺨이 아니라 여기야."
-168 시간의 공포- *라시안*
"다들 모였으면 우선 열쇠부터 찾아봐요. 또 보물찾기를 해야겠군요?"
이른 아침부터 거실로 모여든 사람들은 쇼파 한가운데 놓여진 탁자를 빙 둘러쌌다.
그곳에는 메모지의 내용처럼 흰색 파란색 검정색 빨간색의 상자 4개가 있었다.
어려운 문제라 다들 한숨을 내쉬고 있는 사이 목이 말랐던 료는 식당으로 들어갔다가
다급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식당으로 모인 사람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체 어디갔지?"
"모르겠어요. 목이 말라 음료수를 가지러 왔을뿐인데 들어와보니 이렇네요."
그들이 놀라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분명 하루전까지 모두를 경악시킬만큼 끔찍한 도우미의 시체가 있었는데
밤새 상황이 바뀌어 언제 그랬냐는듯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식탁위와 냉장고 안에는
음료수와 빵 인스턴트 요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준호는 식당 내부를 꼼꼼히 살펴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전자렌지가 새로 생겼네? 그리고 칼이 한자루 없어졌어.."
음식을 본 동팔과 순화는 굶주린 동물처럼 허겁지겁 배를 채우기 시작했고 모두가 놀라면서도
배가 고팠는지 많은 음식중 자신이 먹을만한것을 고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주는 음식엔 관심이 없다는듯 물을 집어들며 말했다.
"분명 사람이 있어.. 이 산장에 우리 말고도 사람이 있다구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러니 메모지를 가져다 놓기도 하고 음식을 가져다 놓기도 하고 그렇죠.
"순화씨. 그렇게 단순히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7명이에요. 아무리 그들이 밤에 조용히
움직인다해도 우리들의 눈에 전혀 띄지 않는다는건 말도 안되요.
전 불면증이 있어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데 아무 기척도 못느꼈어요. 식당이 이정도로
깨끗해지려면 어느정도 소란스러워야 정상 아닌가요?"
진주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메모를 가져다놓고 살인을 하고 흔적을 지우고..
귀신이 아닌이상 그렇게 간단히 해치울수 있는게 아니었다.
진주가 불안에 떨자 상훈은 마음에 무거운 짐을 느끼며 화재를 돌렸다.
"이왕 이렇게 된거 어제처럼 힘을 모아 문제를 맞춰봐요. 첫번째 열쇠의 힌트는
-모두를 지켜주는 결계인 동시에 구속하는 사슬- 이었죠?"
"맞아요."
"어제도 의견을 모으던 도중에 한자로 변환하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오늘도 의견을 모아봐요."
"보호도 해줬다가 구속도 하는게 뭐지? 경찰인가?"
"전 의외로 쉬운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쉽게 접근할수 있죠.
말 그대로 산장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딱딱한 바케트 빵이 목에 걸렸는지 물을 마시던 동팔이 그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상훈은 버릇적으로 안경을 손으로 밀어올리면서 대답했다.
지금 우리는 갈곳이 없잖아요. 잠을 잘수있는곳도 산장뿐이고 음식을 구할수 있는곳도 이곳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보호해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는 이벤트가 끝나는 날까지 여기서
나갈수가 없어요. 깊은 산속이고 차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구속이라고도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산장이 답이라면 열쇠를 찾기위해 여기를 다 뒤져야 한단 말입니까?"
"안타깝게두요.."
언제 이 넓디넓은 산장을 다 뒤진단 말인가..
힌트를 듣고 기쁜것보다 막막함이 우선이였던 그들은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준수가 준호에게 바나나를 집어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생각해봤는데 상훈씨 말처럼 산장이 답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힌트에는 더 넓은 의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형. 어떤거요?"
"첫날 식사할때 나왔던말 기억해요? 기계음 섞인 남자목소리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잊을수 있겠어요. 끔찍해서 밥도 못먹었는데.."
"그럼 준호가 너도 기억하고 있을꺼야. 그 남자가 분명 이렇게 말했었지.
-문 밖으로 나갈수는 있으나 반경 10m 로 제한됩니다.- 라고 했을꺼야. 맞지?"
"네. 시간이 되기전에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은 탈락처리와 동시에 목숨보장도 못해준다고
말했어요. 그것때문에 진주누나 밥먹다 방으로 올라가버렸잖아요."
"모두 들으셨죠? 바로 이 부분이 힌트와 연결되어 있어요. 아무리 보이지 않는 눈이 감시하고
있다해도 24시간 어디로 도망갈지 모르는 사람들을 지켜보기란 쉽지않죠. 실수할수도 있구요.
하지만 목숨까지 운운해가며 장담을 한걸로 보아 산장주변은 무언가로 둘러싸여 있는게 분명해요.
이를테면 가시달린 철조망 같은것 말입니다."
"하지만 차를 타고 도착했을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닙니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꺼에요. 나가서 다같이 확인해보죠."
말을 마친 준수가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가자 적당히 배를 채운 그들은 서둘러 준수를
따라나섰다. 육중한 산장문이 열리자 눈이 부실만큼 강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성한 나무들이 산장 주변을 울타리처럼 빙 둘러싸고 있었고 앞뜰에는 동글동글한 조약돌이
잔뜩 깔려있어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그들은 조심조심 주위를 살폈고 몇걸음 걸어나가자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벽이 빛을 잔뜩
머금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새벽 이슬에 젖은 거미줄 같았다.
"정말 뭐가 있네요? 이게 뭐죠?"
"무슨 실 같은데요? 기계가 말했던게 이건가봐요. 엄청 높게 둘러쳐놨네? 이게 산장주변에
있는 구속의 결계인가.. 판타지같아 후후.."
바둑판 모양으로 얽혀 족히 3m는 넘어보이게 높이 둘러쳐저있는 반짝이는 실이 신기했던 순화는
손을 들어 가까히 다가갔다. 만져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갑자기 상훈이 사색이 되어 그녀에게 소리쳤다.
"순화씨! 물러서요! 만지지 말아요!"
그의 목소리에 놀란 순화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고 상훈은 재빨리 그녀의 옷을 잡아당겨
뒤로 밀어내버렸다.
"상훈씨 왜 그래요? 놀랐잖아요!"
"모두 만지지 말아요! 전기가 흐르고 있어요!"
"네?"
"처음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니.. 진작에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이게 뭔데 그래요?"
"은이에요. 은을 실처럼 가늘게 만들어서 담을 쳐놓은 거라구요. 그러니 숲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았던거구요. 은은 전도체 중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전류가 잘 통해요."
"헉.."
상훈이 설명하는 도중 들쥐 한마리가 후다닥 뛰어들었다.
팔뚝만한 쥐를 본 순화는 소리를 지르며 팔딱팔딱 뛰었지만 쥐가 거미줄같은 함정을 빠져나가려고
접근하자 순간 파지직- 소리와 함께 불꽃을 튀기며 전기를 내뿜는 은색의 실과 찍 소리한번 못내고
감전되어 풍선 터지듯 피섞인 내장을 쏟으며 바짝 타버린 쥐의 시체는 설명하지 못할 충격을
안겨주었다. 만약 손으로 만졌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순화는 자신의 손과 함정을 번갈아 보며 그대로 얼어버렸다.
"초기 반도체는 은으로 만들었어요. 전기가 잘통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은은 너무 가볍고 산화가
잘 되어서 수명이 짧아요. 그래서 지금의 반도체는 금을 사용하는거구요. 처음 근처에 왔을때
약하지만 타는 냄새가 났어요. 아마도 24시간 내내 전기를 흘리니까 얇게 만들어진 은이 버티질
못했던 모양이에요."
"상훈씨가 아니였으면 전 지금쯤.."
"그나마 은이라는것을 빨리 알아차려서 다행이네요. 잔인한놈들.. 이렇게까지 하다니.."
그들은 타는 냄새에 몸서리를 치며 은으로 된 함정을 따라 산장을 쭉 한바퀴 돌았다.
열쇠는 의외로 찾기 쉬운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이 열쇠라는 사실을 알아채기는 힘들었지만..
전기가 흐르는 은과 살짝 닿아있어서 진주는 나뭇가지를 꺾어 조심스럽게 열쇠를 끌어냈다.
열쇠 역시 은이였고 손잡이 부분에 반 나체의 여인의 모습이 새겨저 있는것이 특징이었다.
매우 가볍고 이쑤시게처럼 얇아서 세개 쥐면 뚝 부러져버릴것 같았다.
진주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뒤 조심스럽게 감싸쥐고 모두를 재촉해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첫번째 상자부터 찾아봐요."
혹시나 무슨 소리가 나지 않을까 상자를 이리저리 흔들어보던 료가 실망한듯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무리 흔들어봐도 안이 비어있는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상자를 일렬로 줄맞춰 세우더니 모서리를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물건이 바로 있지 않으면 불안증세를 느끼는 결벽증 환자 같았다.
"첫번째 힌트가 세계 4대 종교였나요? 4대 종교와 상자가 무슨 연관이 있다는거지?"
아.. 그전에 세계 4대 종교가 뭐뭐였죠? 가톨릭하고 불교.."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입니다."
세계 4대 종교는 학생때 교과서에서 배우고 워낙 널리 알려진 종교들이라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다들 잘 알고있었다. 준수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상자 윗부분을 긁으며 말을 꺼냈다.
"어젯밤 곰곰히 생각해봤는데요 세계 4대로 시작하는 힌트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 안될것 같아요.
어짜피 상자는 색으로 구분 되어지니까 힌트도 색과 관련이 있을겁니다. 그렇죠 상훈씨?"
"네. 준수씨 말이 맞아요. 힌트가 말해주는 공통적인 색을 찾아서 상자를 열면 될것 같습니다."
"그럼 누구 떠오르는 의견 있습니까?"
준수가 계속해서 상자 윗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대자 뭔가 있어보였는지 따라하던 동팔이 실증을
내더니 끼어들었다. 상자의 색은 의외로 허술하게 칠해져있어 살짝 벗겨져 손톱 사이에 끼어있었다.
"빨간색 아니에요? 왜 밤에보면 교회 십자가에 빨간색 불켜놓고 그럽디다. 절에서도 표시를(卍)
빨간색으로 하는것 같던뎁쇼? 그러니까 정답은 빨간색입니다."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이슬람교는 녹색이잖아요."
"그건 내 알바 아니구요."
"동팔씨는 순서가 지났다고 대충 생각하나본데요! 이번에 죽는사람은 저에요!"
"거참.. 진주씨는 나 죽게 생겼을때 소설쓰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진주와 동팔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못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조금만 더 두면 욕과 주먹이 오고갈것 같아서 준수는 두 사람의 싸움을 막기위해 큰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의 말에 두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교리 아닐까요? 종교는 원래 죄를 씻고 수련을 하기위해 만들어진 곳이잖아요."
"그렇죠. 기도도 하고 수행도 하는 곳이니까요."
"기독교의 교리는 사랑과 믿음이고, 불교는 자비와 열반, 흰두교는 불교와 비슷하게 평온하고
해탈을 중시하는걸로 알고있고.. 이슬람교는 뭐지?"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비슷해요. 심판과 부활이에요 형."
"응. 고마워. 아무튼 종교라는것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곳이잖아요. 그러니 흰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외에는 공통되는 색이 없는것 같습니다."
"난 무조건 준수씨 의견에 준수!"
순화가 준수의 말에 준수하고 나서자 모두들 동감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주는 손수건 위에 올려놓은 열쇠를 조심스럽게 집어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흰색 상자를 열었다.
조그맣게 딸각- 소리가 나더니 상자가 열리며 열쇠가 구멍안에서 부러져버렸다.
그 안은 스펀지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같은 모양의 열쇠가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료는 진주가 내려놓은 부러진 열쇠를 집어들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래서 기회가 한번뿐이라고 했나보네? 돌리기만 했는데 부러져버리다니..이래서 열쇠를
가느다랗게 만든 모양이네요. 나쁜놈들.."
그는 기분이 나빴는지 부러진 열쇠를 바닥에 힘껏 던저버리고 상자안에 있는 새 열쇠를
조심히 집어들었다.
"두번째 힌트는 세계 4대 뮤지컬이죠? 근데 색을 알아맞추는것보다 4대 뮤지컬 뭐가 있는지
맞추는게 더 어려울것 같네요."
"그거라면 제가 알아요. 뮤지컬을 소재로 쓴 소설 덕분에 공부를 했었거든요."
"아! 진주씨는 소설가였지? 그럼 뭐가 있는지 말해줄래요?"
"네. 우선 가장유명한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이 있어요. 두번째는 켓츠(Cats)
세번째는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 네번째는 미스 사이공(Miss Saigon) 이렇게 네가지에요."
"흠.. 오페라의 유령밖에 모르겠네요. 워낙 뮤지컬과는 거리가 멀어서.. 하하"
료가 멋쩍은듯 머리를 긁적이자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누나가 말해준 네가지를 영어로 바꿔 적어봤거든요? 4가지중 흰색은 나왔으니까 빼고
빨강 검정 파랑이 남았죠? 알파벳을 이리저리 조합해보면 검정(Black)은 K라는 알파벳이 없어서
못만들고 빨강(Red)은 D라는 알파벳이 없어서 못만드네요. 답은 파랑(Blue)이 아닐까요?"
"꼬마야. 머리는 잘 굴렸는데 자세히 봐. U가 없어서 파랑(Blue)이란 단어도 못만들어."
"어? 정말이네? 비슷하게 갔나 했더니만.."
"너무 머리가 좋아도 안좋다니까? 쓸때없이 깊이 파고들잖아. 난 답을 알것같아."
"앗! 진주누나. 정말 답을 아세요?"
"그런것같아. 의외로 단순해."
늘 까탈스럽고 날카로워 모두에게 눈총을 받는 그녀도 답을 말함에 있어서는 진지했다.
모두 귀를 기울여 집중하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다들 내용 아시죠?"
"오페라 극장밑에 살던 남자가 무명 여 배우를 사랑해 그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려고 한명씩
죽이는거 아닌가요?"
"맞아요. 그래서 그를 '어둠의 유령'이라 불렀었죠. 어둠이 의미하는 색은 검정이구요.
레 미제라블은 장발장을 소재로 만들어진 뮤지컬이에요. 빵 하나를 훔쳐 감옥에 가게된 억울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그 당시 장발장의 사정을 모르던 사람들은 그를 물건을 훔치는 '검은손' 이라고
수근거렸었죠. 미스사이공은 현대판 나비 부인이에요. 월남전 당시 베트남 여인이였던 킴은
미군장교를 사랑하게 되어 아이를 갖게되죠. 하지만 전쟁이 끝난후 미군장교는 본토로 철수한채
돌아오지 않았고 킴은 아이를 낳고 그를 애타게 기다리다 결국 자살하고 말아요. 굉장히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지만 나비부인은 자살한 나비. 속칭 '검은 나비' 라고 불리워졌죠.
마지막 켓츠는 말씀 안드려도 제목만으로 힌트가 되겠죠?"
"검은 고양이!"
"맞아요. 고양이 하면 보통 검은 고양이 네로가 생각나잖아요. 후후..그래서 저는 두번째 상자가
검은색이라고 생각해요."
"와우~!!"
그녀의 군더더기 없는 설명에 다들 감탄했고 료는 재빨리 검은색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열쇠가 부러지며 상자가 열렸고 또 다른 열쇠가 나왔다.
동팔은 누런 이빨을 씨익 드러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눈감고 찍어도 반은 성공한거네요! 생각보다 오늘 문제는 너무 잘 풀리는군요!"
"그러게요. 세번째만 풀면 끝이겠어요."
상훈도 덩달아 기뻐하면 메모지를 들여다 보았다.
세번째 힌트는 세계 4대 문명.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세계 4대 문명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하 문명, 인더스 문명 이에요.
그럼 마지막 힌트인 세계 4대 살인마를 아는분 있나요?"
그의 질문에 준호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세계 4대 살인마는 기준이 모호해요. 저마다 알고있는게 다르니까요. 어떤 사람은 소설책에 나오는
살인마를 실존인물처럼 믿어버리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면도날 잭이 대표적인 경우죠.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를 최고 살인마로 손꼽기도 해요. 그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은 끔찍했죠.
고대 살인마인지, 국내의 살인마인지, 아니면 현대의 살인마인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져요.
지금 생각나는건 세명 뿐이네요."
"면도날 잭은 실존 인물 아닌가?"
"면도날 잭이라기보다는 잭 더 리퍼가 정확하겠죠. 둘은 다르거든요."
"암튼 알고 있는 세명이라도 말해줄래?"
"네. 상훈형. 우선 엘리자베스 바토리에요.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피로 목욕을 했고 그 피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처녀들을 끔찍하게 죽였죠. 그래서 그녀를 피의 여왕, 또는 철의 여왕이라고 불렀어요.
두번째는 테페즈에요. 꼬챙이로 사람을 찔러죽이고 피를 마셨다는 그는 드랴큘라의 시초가 되기도해요
세번째는 질드레에요. 잔 다르크 아시죠? 질드레는 원래 잔 다르크의 경비병이였데요. 그는
잔 다르크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잖아요. 그 후에 사람들을
저주하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무차별적 살인을 저질렀나봐요. 세사람 다 죽인 사람이 500 이상으로
밝혀졌다죠? 방법이 잔인하고 끔찍하기 이를데 없었나봐요. 컴퓨터를 사용할수 있다면 다른 인물들도
알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 사람들 밖에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내 예상이 맞았어."
"마지막 상자가 빨간색일것라는 것 말이죠?"
"그래. 세번째 상자가 파란색이라고 생각했거든."
"이제 형의 의견을 말해줄래요?"
"세계 4대 문명의 공통점은 비옥한 토지와 발달된 문명이야. 하지만 그렇게 세부적인것 말고도
가장 큰 공통점이 있어. 그곳들은 큰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권이라는거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유플라테스강, 황하 문명은 중국 황하강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과 겐지스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있어. 강은 네 이름처럼 준호를 상징하잖아?
그래서 세번째 상자는 청색이라는 생각이 들어."
"좋아요. 딱 떨어지네요. 살인마가 완벽하지 않은게 흠이지만..아무튼 어서 열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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