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준수는 몸을 틀어 옆으로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번쩍이는 물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4자가 적혀진 방문에 그대로 박혀버렸다.
"동팔씨! 왜 이러세요!"
"악마같은 놈! 죽어라!"
동팔의 눈은 정상이 아니였다.
광기와 원망을 가득담은 눈은 정확히 준수를 향해있었고 타겟을 놓친 동팔은 칼을 빼내기
위해 끙끙거리더니 안되겠다 싶었는지 벽으로 달려가 다른 칼을 빼들고 거꾸로 쥔채
뒤뚱거리며 달려들었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준수는 피하지도 못하고 팔을 잡고 정면으로 맞섰으며 료도 상훈을
버린채 동팔의 허리를 잡고 매달렸다.
준수도 키가 크고 마른 편이지만 운동으로 인해 잘 다져진 체구였다.
하지만 집채만한 동팔의 힘에는 역부족이였다.
그는 맹목적으로 살기를 품고 달려드는 동팔의 양손을 붙잡고 버텼지만 이미 칼날은
뺨을 스치고 날카로운 고통을 주며 파고들었다.
이대로 버티지 못한다면 그대로 얼굴을 관통당할터.
뺨으로부터 끈적한 액체가 볼을 간지럽히며 흘러내렸다.
"동팔씨!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 자식! 마스터 H! 내가 죽여버리겠어!"
"미쳤어요? 빨리 그손 놔요! 준수씨를 죽일 셈이에요?"
"너 나를 죽일꺼지? 그러니 내가 먼저 죽여주겠다구! 으하하하!"
"준수씨! 괜찮아요?"
"료씨! 뒤를 봐요!"
준수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료는 문뜩 한기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의 뒤에선 여전히 등을 구부린채 자신을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짓고있는 상훈이 있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웃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공포가 느껴졌다.
"료씨! 내 가방 열면 MP3 있어요. 플레이 버튼 누르고 이어폰 음량 최대로 열고 상훈씨 귀에 들려줘요!"
"하지만 준수씨는요!"
"저 힘빠지기 전에 어서요! 상훈씨마저 덤벼들면 큰일.. 윽!"
준수가 또 한군데를 다쳤는지 나지막한 비명을 질렀다.
료는 그의 비명을 듣고는 망설임 없이 가방을 향해 뛰어갔다.
상훈은 여전히 미소를 띄우며 한발한발 걸어 오고 있었다.
긴장한 료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준수씨! 플레이 안되요!"
"그..그럴리가요!"
"작동안해요! 어떻게 하죠?"
"아! 홀드! 홀드 걸려있어요! 푸세요!"
료는 침착하려 애쓰며 MP3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노래가 흘러나오자 이어폰의 음량을 최대로 올린다음 상훈에게 달려들어
귀에 억지로 이어폰을 꽂았다.
처음에는 상훈이 간지러운듯 고개를 흔들어서 애를 먹었지만 등 뒤로 돌아가서
억지로 쑤셔넣자 더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잠시 시끄러운 음악을 멍하니 감상하던 상훈은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는지 휘청하더니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2번 방문을 열고 토악질을 해댔다.
상훈이 돌아왔음을 확인한 료는 곧장 동팔에게로 달려들어 허리를 잡고 세게 끌어당겼다.
이미 준수는 얼굴에 여러개의 상처가 나있는 상태였고 동팔은 여전히 강한힘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료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허리를 잡을 손을 놓고 다리를 들어 있는 힘껏 동팔의 종아리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중심을 잃은 동팔이 한쪽 무릎을 꿇며 칼을 떨어뜨렸고 곧 분노의
눈은 준수를 벗어나 료를 향했다.
동팔이 괴성과 함께 마스터 H를 외치며 칼을 고쳐쥐자 준수는 그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그의 발에 정확히 급소가 작렬되어지자 동팔은 컥- 소리를 내며 앞으로
거꾸러졌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손을 더듬어 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준수는 서있는 자세 그대로 그의 등을 짓밟았다.
동료에게는 못할 짓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할것 같았다.
힘없이 방 한구석에 대자로 뻗어버린 동팔을 보며 준수는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료는 상훈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며 이어폰이 빠지지 않게 잡아주었고
대충 수습되자 두 사람은 4번방의 문을 열었다.
그 안은 붉은 피빛 조명의 암실같았다.
벽 한가득 사진들이 붙어있었지만 둘러본 결과 별다른 위험 요소가 없어보여
상훈을 들여보내고 쓰러진 준호와 순화를 안아올렸다.
그리고 동팔은 두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들수없다고 판단.
다리를 한쪽씩 나눠들고 질질 끌어 방안으로 옮겼다.
준수와 료는 방문을 완전히 닫고서야 안심한듯 벽에 기대어 쉴수 있었다.
그들은 가방속에 넣어온 미적지근한 물을 나눠마시며 숨을 돌렸고 한참을 기다리자
하나 둘씩 정신을 차렸다.
"형! 얼굴이 왜 이래요!"
준호는 깨어나자마자 준수를 찾아댔고 칼날에 스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보자
이유를 묻기도 전에 굵은 눈물방울을 쏟아냈다.
"왜 울어? 죽은것도 아닌데.."
"얼굴 왜이래요? 아프지 않아요?"
"괜찮아.. 울지마.."
"누구 짓이에요? 함정에 걸린거에요?"
"이리와.."
준호는 피 맺힌 얼굴에 손대는것조차 두려워 만지지도 못하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더니 준수가 팔을 뻗어 안아주자 급기야 서러운듯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유심있게 살펴보던 료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수씨. 제말 오해없이 들어 주세요."
"네. 말씀하세요."
"준호이와 준수씨 두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에요?"
"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까운 형 동생으로는 생각되어지지 않아요. 준호가 준수씨에게
보이는 눈빛도 그렇고 준수씨가 보이는 행동도 평범해 보이지 않아요. 마치 연인사이 같은.."
"맞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에요."
"네?"
"료씨는 이해할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두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럼 산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인가요?"
"아닙니다. 감정을 느낀건 분명 산장으로 오기 전 차안에서 였지만 원래부터 알던 사이는 아닙니다."
준수가 준호의 눈물을 닦아주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자 료는 피식 웃으며 준수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린채 조용히 말했다.
"이해 못할리가요..저도 그쪽이거든요.. 하지만 아쉽네요.. 저 아이는 저 역시
마음에 두고 있었으니까요.."
"........................"
"분발합시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게 된다면 정정당당히 페어플레이 하자구요.
그러니 그전에 죽지마세요. 준수씨."
료는 뭔가 의미있는 눈빛으로 웃어 보이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벽에 붙은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준수는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투가 꼭 준호를 두고 내기를 하자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준호는 귓말의 내용도 모른채 겨우 울음을 그치고 준수의 품에 쓰러지듯 기대어
안겨있었고 상훈은 막 정신을 차린 순화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어느정도 상황이 정리되고 간단한 먹을 거리로 배를 채우자 동팔이 비비적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자신의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호소했다.
"아으윽! 왜 이래? 옆구리 아파 죽겠네..썅.."
"동팔씨. 시끄러워요! 동팔씨가 준수씨 죽일뻔한거 아세요?"
"그게 뭔 소리요?"
"눈 있으면 준수씨 얼굴을 좀 봐요. 동팔씨가 칼들고 덤비는 바람에 다친거잖아요!"
"정말요?"
료의 비난섞인 말을 들은 동팔은 피투성이가 된 준수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놀라
거구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정말 내가 이런 겁니까?"
"괜찮아요..제 정신으로 그런것도 아닌데요.."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이해할수가 없네.."
"3번방에 강한 최면 효과를 일으키는 전파가 흐르고 있었어요. 청각에 예민한
동팔씨가 그 이유로 정신을 놓은거죠.. 신경쓰지 마세요."
"벌써 들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씁니까? 생각은 나지 않지만 정말 미안하게 됬습니다.. 준수씨.."
동팔은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의외의 모습에 준수도 화를 누그러뜨리고 미소로 답했다.
료는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을 쭉 훑어보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은 별 의미 없어보이네요. 같은 인물이 반복되어 찍혀있는
가족 사진이에요. 하지만 여기 집게로 집혀있는 6장의 사진이 좀 이상해요."
그의 말이 끝나자 상훈은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나갔다.
5번 방을 연결하는 문앞에는 투명한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었고 유리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같은 질감의 유리 액자가 걸려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액자 옆에는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던 준호는 조용히 사진을 집어들었다.
"사진을 시간의 흐름대로 순서에 맞게 액자에 넣는 것인가 보네요."
준호는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모두의 귀에는 그럴듯한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사진은 6장. 순서를 무시하고 대충 내용은 이러했다.
1번째 사진. 7살에서 10살 사이로 추정되는 여자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처럼 보이는
남녀가 다정히 쇼파에 앉아 찍은 사진. 탁자 위에는 케잌이 놓여져 있다.
2번째 사진. 아이가 케잌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3번째 사진. 창가에서 아이의 부모가 다정하게 어깨 동무를 하고 서있다.
4번째 사진. 아이가 엄마와 침대에서 자고 있다. 가장자리에 누군가의 손이 살짝 찍혀있다.
5번째 사진. 창가에서 내려다 보이는 밤 야경이 찍혀있다.
6번째 사진. 대낮 거리에서 케잌상자를 든 아빠와 아이가 즐거운듯 웃고 있다.
순화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아이가 마음에 드는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요? 부모님은 평범한 외모인데 아이는 마치 인형같아요. 나도 이런
아이를 낳아야 할텐데.."
그녀가 삼천포로 빠져들며 생글거리자 상훈은 조용히 다가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원래 부모가 뛰어나지 않아도 유전자라는 놈들이 워낙 변수가 심해서 간혹 다른 아이가
나오기도 해요. 아마 순화씨도 예쁜아이를 낳을수 있을껄요? 얼굴이 워낙 미인이니까요."
"어머! 정말요? 아.. 기쁘네요"
순화는 자신을 예쁘다고 말해주는 상훈의 말에 마냥 기분이좋았다.
하지만 상훈이 그녀를 보며 상대가 자신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은 아마 꿈에도 모를것이다.
그녀는 입이 마르도록 아이를 칭찬하며 말을 꺼냈다.
"이건 쉽네요. 아이 생일날 놀이공원에 다녀와서 파티를 한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처음이 엄마와 아이가 자고있는 아침이고 그 다음이 벽에 잔뜩 붙어있는
놀이공원 사진. 그 다음은..케잌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사진. 집에서 케잌을 꺼내들고
기뻐하는 사진! 그 다음이 탁자위에 케잌을 올려놓고 찍은 가족사진이구 다음이 엄마
아빠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 마지막이 자기전 찍은 야경 사진일거에요. 어때요?"
사람들이 조용히 수긍하는 눈빛을 보내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며 사진을
집어들고 액자로 다가가 순서대로 사진을 넣었다.
유리 액자는 윗부분이 뚫여있어 쉽게 사진을 넣었다 뺐다 할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그녀가 마지막 사진을 넣자 갑자기 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다란 유리벽이 스르르
움직이며 1M쯤 전진했다.
놀란 순화는 후다닥 뒷걸음질치며 외쳤다.
"어떻게해..틀렸나봐!"
"벽이 이동하네요? 영화도 아니고 원.."
상훈이 재빨리 그녀를 막아서고 앞으로 나섰다.
의기소침해진 순화는 말없이 벽에 기대어 앉았고 상훈은 안경을 손으로 밀어올리며
뚫어지게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제 생각에는 부모님 사진이 틀린것 같네요. 순화씨는 이 사진을 5번에 넣었잖아요?
하지만 보세요. 케잌을 꺼내며 웃고있는 3번 사진을 보면 옆으로 그림자가 져있죠?
거실에서 그림자가 졌다는건 실내에 불이 켜져있다는 뜻이에요. 쇼파에 앉아있는
가족사진을 봐도 확실히 불이 켜져있죠?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 사진을 보면 등 뒤로 창이 보이잖아요. 날이 밝은 것으로 보아
이건 낮에 찍은 사진이에요. 그러므로 이 사진이 3번이 되고 나머지 사진들이 하나씩 뒤로
밀려나야 된다는 말이죠."
"와~ 정말 그렇구나!"
상훈의 그럴듯한 추리에 힘이 난 순화는 다시 벌떡 일어나 사진의 순서를 바꿨다.
하지만 또 다시 유리벽이 움직이더니 큰 폭으로 전진했다.
거대한 벽이 전진하자 벽에 걸린 사진들도 우수수 떨어져내렸고 가구들이 드르륵거리며
밀려났다. 이에 동팔이 나섰다.
"혹시 낮과 밤이 바뀐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자고 있는게 시작이 아니라 케잌을 사들고
걸어오는게 시작인거죠. 그 다음에는 상훈씨의 말대로 창가에서 찍은 부모사진. 케잌을
들고 있는 아이사진. 다음엔 가족사진. 야경. 그리고 자고있는사진.. 이렇게요."
동팔이 자신의 말을 토대로 순서를 바꾸려고 하자 준호는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어쩌면 우리가 케잌이라는것에 너무 집착하는지도 몰라요. 저 케잌이 꼭 사가지고
들어왔다고는 볼수 없잖아요? 집에서 엄마와 아이가 만들어서 기념사진을 찍은다음
자고 일어나서 다음날 케잌을 가지고 놀이공원에 놀러간걸수도 있어요."
"흠.. 듣고보니 그것도 말이 되네? 그럼 둘다 해보자."
"잠깐만요! 형! 천천히 더 생각해봐요!"
"자식..긴장하기는.. 좋아! 내가 특별히 네 의견을 먼저 실행시켜보지."
"그 말이 아닌데.."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