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갑자기 천장에서 폭우같이 모래와 돌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들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이리저리 방황했다.
전파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자욱한 먼지를 날리며 떨어지는 모래에 이미 씻겨져 내린지
오래였다. 준수는 걸음을 옮기던 도중 어깨의 상처위로 돌이 떨어지자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동팔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재빨리 근처에 있는 총을 하나 집어들고 자물쇠를 향해서
쏘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려온 총성에 모두들 이성을 잃었다.
"동팔씨! 뭐하는거에요!"
"보면 몰라요? 자물쇠를 부숴야지 나가죠! 이대로 깔려 뒤지고 싶어요?"
어찌나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지 벌써 돌 섞인 모래는 허벅지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동팔은 총을 쥐고 군 시절 사격훈련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물쇠를 향해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도 썩 좋지 않은 사격실력이었지만 지금은 마음까지 불안한 상태인지라 작은 자물쇠가
쉽게 맞아주지 않았다. 총에 총알은 한발씩 장전되어 있는지 한번 발사되자 무용지물이 되었다.
동팔은 괴력을 발위해서 가득 쌓인 모래를 뚫고 총을 집어들어 계속 문을 향해 쏘았다.
근처로 다가가면 정확히 표적을 맞출수 있지만 만약 탄피가 문에 반동해 튕겨져 나온다면 더없이
위험하기 때문에 그는 멀찌감치 서서 한쪽눈을 감고 미친듯이 총을 쏘아댔다.
사람들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총성에 진저리가 쳐질만큼 귀가 울렸지만 물 밀듯 떨어져 내리는
이물질과 자욱한 연기때문에 격한 기침을 해가며 몸을 낮출수 밖에 없었다.
불행중 다행이 동팔이 8번째 사격으로 자물쇠를 맞췄고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앞 다투어 모래를
손으로 파해치며 필사적으로 2번방으로 빠져나갔다.
동팔은 믿음직스럽게 사람들을 모두 이동시키고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모래가 자꾸 문을 비집고 세어나와 닫기 어려웠지만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겨우 문을 닫고 2번방으로
들어선 그들은 온몸에 먼지를 털며 괴로워했다.
"아악! 너무해! 입속에 까지 모래가 들어갔어!"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동팔씨.. 온몸이 상처 투성이에요.. 괜찮아요?"
"아하하.. 저는 맷집이 무척 셉니다! 이깟걸로 쓰러질 사람이 아니죠!"
동팔 역시 온몸이 쑤시고 아파왔지만 모두가 무사한것에 큰 위안을 삼으며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처음으로 모두의 목숨을 구해줬던지라 나름대로 그에게 있어서는 의미가 컸다.
모두들 듬직했던 동팔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번방은 여전히 바닥이 없는 뻥 뚫린 공간이었으며 다시금 벌레의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또 어떤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며 벽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처음과는 달리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방문에 커다랗게 '기억력 테스트' 라고 씌여 있었다.
그들은 호흡이 원활해지고 기침이 멈추자 다들 조심스레 일어서서 뻥 뚫린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조용한 음악이 잠깐 흘러 나오더니 뒤 이어 여자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1부터 40 까지의 숫자를 떠올리십시오. 7 - 16 - 21 - 6 - 8 - 27 - 11 - 15 - 39 순서대로 부르세요."
"뭐라구?"
순식간에 지나간 숫자를 기억하고 부르라는 말에 상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몇개의 숫자가 불리워졌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기억할수 있단 말인가?
그가 작은 소리로 기억나는 몇개의 숫자를 되새기자 준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준호 역시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런 자신의 얼굴을 말없이 관찰하는 또 다른 두개의 눈이 있다는 사실을..
준호는 아무도 나서지 않고 망설이자 자신이 앞으로 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7 - 16 - 21 - 6 - 8 - 27 - 11 - 15 - 39 "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닥이 진동하며 전과 마찬가지로 50Cm 남짓 되는 폭의 바닥이 밀려올라왔다.
처음 미션 메모에 함정이 전환 된다기에 전혀 다른 방을 예상했었는데 방은 변하지 않고 함정의
내용이나 문제만 바뀌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숫자를 기억하는게 끝인가봐요. 함정의 규칙은 같은 모양이네요."
준호가 바닥에 먼저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자 사람들은 빠른 동작으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잠시 대기하자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부터 40 까지의 숫자를 떠올리십시오. 13 - 35 - 1 - 19 - 4 - 21 - 33 - 22 - 17 순서대로 부르세요."
처음과는 달리 집중하고 듣자 생각보다 문제는 쉬워보였다.
그 만큼 이곳에는 지능이 좋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상훈이 숫자를 외워 답을 불렀다.
"13 - 35 - 1 - 19 - 4 - 21 - 33 - 22 - 17"
그의 목소리가 멈추자 또 다시 2번째 바닥이 밀려 올라왔다. 상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1부터 40 까지의 숫자를 떠올리십시오. 16 - (Red) 19 - 40 - (Red) 12 - 8 - 10 - 1 - (Red) 24 - 31
순서대로 부르세요."
"레드? 레드는 또 뭐야?"
도저히 답을 외울수 없었던 순화는 레드 라는 단어를 듣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했다.
누구 못지않게 기억력이 좋았던 료는 목소리에서 나온대로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답을 외쳤다
"16 - (Red) 19 - 40 - (Red) 12 - 8 - 10 - 1 - (Red) 24 - 31"
하지만 답이 정확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은 요란하게 진동하며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또 다시 벌레와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에 순화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질러댔다.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바닥에 내려 앉자 준호는 료에게 나지막히 속삭였다.
"형 답이 정확했는데도 바닥이 내려앉은걸 보면 레드에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겠죠?"
"아마도.. 그런것 같아.."
"갑자기 떠오른게 있는데요.. 이거.. 말이 안되려나?"
"뭔데?"
"제가 평소에 즐겨했던 '오디션' 이라는 온라인 게임이 있거든요? 음악을 듣고 화살표를 입력하면
그대로 케릭터가 춤을 추는거요."
"헉.. 너도 그 게임 알아?"
"형도 아세요?"
"그럼! 내가 그 게임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와~ 그럼 설명하기 편하겠네요. 왜 찬스모드 있죠? Del 키를 누르면 화살표중 일부가 빨간색으로
표시되고 플레이어가 빨간색으로 표시된 화살표를 반대로 입력해야 하는것 말이에요."
"아.. 그러니까 네 말은.."
"네. 왜 갑자기 오디션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드라고 표시되어 있는 숫자는 반대로 불러야
하는것 아닐까요?"
"반대라면 대칭되는 숫자를 불러야 한다는거지?"
그들이 뭔가를 열심히 속삭이고 있을때 머리위로 다시 한번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번 내려가 버린 바닥은 키워드를 잃기 때문에 다음 문제를 맞춰야 올라갈수 있었다.
"1부터 40 까지의 숫자를 떠올리십시오. 33 - (Red) 6 - 37 - (Red) 19 - 25 - 4 - 27 - (Red) 22 - 11
순서대로 부르세요."
표로 1부터 40 까지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그러니까 1의 대칭되는 수는 40. 2에 대칭되는 수는 39 인것처럼 레드라고 표시된 수는 반대로
불러보는거죠. 한번 해볼까요?"
"그래. 해보자. 일리있다."
레드라고 표시된 숫자는 3개.
첫번째가 6 두번째가 19 세번째가 22 였다.
료와 준호는 어둠속에서 집중하며 머릿속으로 숫자를 떠올려 조합하기 시작했다.
6에 대칭되는 수는 35. 19에 대칭되는 수는 22. 22 는 19 가 되는 것이었다.
료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답을 외쳤다.
"33 - 35 - 37 - 22 - 25 - 4 - 27 - 19 - 11"
답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는지 그들이 서있던 2번 바닥과 함께 3번 바닥까지 동시에 올라왔다.
아무리 서로를 의심한다 해도 그들은 최고의 두뇌를 자랑하는 이들임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계속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레드의 비밀을 알아버린 료와 준호와 상훈은 답을 외워
함정을 통과해내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가 가까워져 있었고 허기와 피곤에 지친 순화와 동팔은 말없이 그들에게
묻어가고 있었으며 상처에서 심한 열이 나는 준수는 미간을 찌푸린채 바닥에 앉아있었다.
힘이 없고 상처가 쑤신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순간적인 기억력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방은
세사람에게 맡기는게 좋다고 판단했다. 빨리 돌아가 상처를 치료해야 할것 같았다.
6번째 바닥까지 무사히 건너오자 다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1부터 40 까지의 숫자를 떠올리십시오. 28 - (Yellow) 3 - 13 - (Red) 26 - 14 - 9 - 36 - (Yellow) 21 -
23 순서대로 부르세요."
들어올때와 마찬가지로 7번째 바닥만 올라와준다면 다들 무사히 건너 뛰겠지만 또 한번의 예상을
깨고 엘로우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오자 다들 기운이 빠진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머리의 한계를 시험할 작정인가.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뛰어보려 했으나 착지하는 곳에 보폭이 워낙 좁아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대로 20분이라는 시간을 까먹자 눈을 감고 작게 신음하던 준수가 말을 꺼냈다.
"글자를 반전 시켜보세요."
"네? 여지껏 대칭되는 숫자를 넣었잖아요. 이번에는 레드가 아니라 엘로우라구요."
"제 말은 대칭이 아니라.. 반전입니다. 숫자의 앞 뒤를 바꿔보라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24 라면 42 가
되는 것 처럼 말이에요."
"아.."
"노랑색은 경고를 나타내는 색이기도 하지만 반전을 의미하기도 해요. 한번 해보세요."
"네. 준수씨."
료는 순순히 그의 생각을 받아들여 머릿속으로 엘로우에 해당하는 숫자를 떠올렸다.
숫자는 두개. 3 하고 21. 그의 말대로 반전시키자면 3은 03으로 표시하여 30 이 되는것이고 21은
12 가 되는 것이다. 중간에 레드로 표시된 숫자 26는 대칭시켜 15로 표시.
료는 마지막 답이 맞길 간절하게 바라며 천천히 숫자를 외쳤다.
"28 - 30 - 13 - 15 - 14 - 9 - 36 - 12 - 23 "
그가 부른 9개의 숫자는 정확한 키워드로 작용해 7번째 바닥을 불러 일으켰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예감한 그들은 서둘러 폴짝 뛰어 건너갔다.
몸이 점점 둔해지던 준수가 하마트면 사이로 빠질 뻔했지만 다행히 먼저 건너간 동팔이 손을
잡아주는 바람에 무사할수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1번 방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멈추세요. 처음 모세의 기적을 본따 바닥이 갈라지던 방이에요. 제가 먼저 두드려 볼께요."
"아.. 또 멀리 뛰기는 아니겠죠? 이번에는 저 정말 못뛰어요. 전에는 발 돋움을 할수 있는 계단이
있었음에도 죽을 뻔했는데 지금은 그럴만한 여유도 없잖습니까..젠장.."
"안심하세요. 동팔씨. 다행히 바닥은 반응하지 않는것 같군요."
"그래요?"
처음 기억이 떠올랐는지 동팔은 어느때보다도 몸을 사렸지만 준수가 바닥을 확인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말해주자 동팔은 혹여나 또 다시 바닥이 열릴까 두려워 잽싸게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그곳은 이상할만큼 조용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함정 같은것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둘러보다 11시가 넘었음을 인식하고 다들 방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 문만 지나 계단으로 올라가면 지긋지긋한 지하를 무사히 벗어날수 있으리라.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으며 마지막을 알리는 화면의 글이 한줄 덩그라니
떠올라 깜박이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나가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방안에 열쇠가 있다는 말에 그들은 흩어져서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방이라 숨길곳도 없었는데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벽에 찰싹 붙어서 손으로 훑어가며 빙빙 돌던 순화가 벽의 색과 같은 빛으로 위장 되어있는
열쇠를 발견하고 그것을 떼어다가 문을 열었다.
정말 이게 끝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쉽게 문이 열렸고 곰팡이가 피어있는 허름한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먼지 알레르기가 있다고 인상을 찌푸리며 들어왔던 그녀도 새삼 계단이
반가웠는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남은 시간은 30분. 올라가서 시계문을 열고 산장으로 들어서면 지옥같던 하루를 마칠수 있다.
동팔은 계단으로 올라가 벽을 밀어 재꼈고 힘에 부친듯 낑낑 거리자 모두들 달라 붙어 그를 도왔다.
하지만 상훈은 뭔가를 발견한듯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더 밀면 열리겠어요! 상훈씨! 뭐해요! 어서 와서 도와주세요!"
순화는 꾸물거리는 상훈에게 큰소리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는 그녀의 말따위는 안중에도 없는듯
오히려 방 반대편 구석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뭐지?"
"상훈씨! 빨리 와요!"
"아악!!!!!!!!!!!!!!"
땀에 가득젖은 사람들의 등뒤로 날카로운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방안으로 가득 퍼지는
연기 사이로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상훈의 모습이 슬로우 영상처럼 눈을 스쳤다.
"상훈씨!!!!!!"
사람이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 대신 유리가 깨지는 듯한 맑은 소리가 났다.
상훈은 그들의 눈앞에서 조각처럼 산산히 부서져버렸다.
믿을수 없는 장면에 순화는 그대로 기절했고 사람들은 할말을 잃은채 하얗게 질렸다.
"질소 가스...상훈 형은 급속으로 얼어버린 다음 깨진거야.."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채 유리처럼 부서진 상훈에 모습에 질색한 동팔은 젖먹던 힘을 다해 시계문을
열었고 사람들은 서둘러 기절한 순화를 들쳐업고 지옥같은 지하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모두 모습을 감추고 쾅- 하며 문이 닫히자 다시금 어두워진 적막의 방안으로 정체 모를
검은 그림자가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다들 머리는 좋은데 시력은 엉망이로군? 모든 방에는 버튼 하나로 함정을 무효화 시킬수 있는 장치가
되어있는데.. 하긴.. 처음 3번 방에서 돼지같은 놈이 싸우다 넘어져서 그 장치를 건들였지?
그것만 아니었으면 4번방의 문을 열기도 전에 열 센서가 작동되어 순식간에 통구이가 되었을텐데..
아쉽단말이야.. 에구.. 헛소리 그만하고 죽은 녀석 시체나 치워야겠다. 이 녀석이 그래도 가장
쓸만했는데.. 장치를 너무 늦게 발견해 함정이 발동한게 안타깝네.. 후후..
우선 함정을 멈추고 일을 시작 해야겠다."
검은 그림자는 뭐가 그리 재미 있는지 어둠속에서 킬킬 거리며 방 왼쪽 구석 바닥에 튀어나와있는
흰색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쿠궁- 소리와 함께 모든 함정이 일제히 멈춰 더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seven-
-168 시간의 공포- *라시안*
"상훈씨.. 상훈씨.."
"순화씨. 진정하세요."
시계문을 빠져 나왔다기 보다는 지독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데 뒤엉켜 말려나온 그들은
생생하게 각인되어 잡념처럼 떠나지 않는 상훈의 죽음에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사람이 눈 앞에서 유리처럼 부서져 버렸으니 정말 자신의 눈이라도 의심해봐야 할 판이였다.
상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피곤에 지친 그들의 머릿속에는 슬픔의 감정보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그토록 보기 싫었던 산장의 쇼파가 왜 그리도 반가워 보이는건지 새삼 놀라웠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동료의 죽음 앞에서는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단지 죽음의 방법이 너무나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쉽게 현실이라 인정 되어지지 않을 뿐이다.
순화가 상훈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자 모두들 안타까워 했다.
상훈이 순화를 맘에 두고 있어 늘 뒤에서 그녀 모르게 이것 저것 도움이 되었다는걸 눈치빠른
그들이 모르리 없었다.
순화 역시 상훈의 친절과 자신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을 가슴 깊히 담아두고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식사라곤 점심 나절에 준수가 챙겨온 간단한 빵과 음료가 다였기 때문에 몹시 허기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 누구도 식욕을 느끼지 않았다.
며칠째 끝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게임 속에서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던지라 모두들 눈두덩이에
짙은 그늘이 지고 헬쓱한 얼굴이었다.
준수와 동팔은 울음을 멈추지 않는 순화를 억지로 부축해 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동팔이 소란스럽게 바닥을 울리며 둔한 걸음으로 뛰어나왔다.
"미션 메모! 제 방에 있습니다!"
다들 미션이란 말에 치를 떨었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던 단어였다.
하지만 내용이 궁금했던 머리는 재빨리 다리에 명령을 내려 몸을 복도로 끌고 나갔다.
동팔은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메모를 펼쳐 들었다.
*산장의 비밀. 제 5장*
네번째 주인공은 동팔 님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본인의 이름을 확인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동반자로는 니시키도 료 님이 선택되었습니다.
동팔 님이 정답을 맞추지 못할경우 니시키도 료 님께서는 12시간안에 살해당하게 될것입니다.
참고하시고 최선을 다해 미션을 수행해 주십시오.
*Mision = 산장내 감춰져 있는 8개의 그림을 찾아내고 그림에 있는 힌트를 조합하여 정답을 맞춰라.
*Hint = 1. 찾으실 그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미켈란젤로 - 천지창조
2) 밀레 - 만종
3) 이중섭 - 흰 소
4) 피카소 - 꿈
5) 레니 - 베아트리체
6) 달리 - 기억의 연속
7) 레오나드로 다빈치 - 최후의 만찬
8) 뭉크 - 절규
2. 그림의 순서 - 그들의 그림을 묶어 한권의 책으로 낸다면 이렇게 표기할 것입니다.
3. 답 - 답인 이것은 현대 사회의 문명혜택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체에 이롭기도 하지만 해롭기도 합니다. 때로는 과거의 사람을 기억하는
매개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정답 제출시간은 오후 11시 30분부터 30분간입니다. 그 전에는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세한 힌트와 설명을 드렸으니 충분히 좋은 결과가 있을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Master. H-
"이번엔 그림이네.. 썅.. 우리 머리가 컴퓨터여!"
동팔이 화를 내며 메모를 구겨 던져버리자 료가 아무말 없이 메모를 집어 들었다.
그는 태연해 보였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두 사람의 죽음을 생생히 목격한 상태에서 자신의 이름이 살인 명단에 올랐으니 괜찮은게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른다.
잠시 적막이 감돌자 동팔이 괜히 짜증을 내며 주먹으로 벽을 툭툭 쳤다.
"미션이고 지랄이고 우선 우리도 살고 봐야 할것 아닙니까. 지금은 자고 내일 생각합시다. 눈이 아파
죽겠네요. 유격 훈련할때보다 더 몸이 쑤십니다."
아무래도 지하실에서의 하루는 머리만 쓰던 처음 3일과는 다르게 육체적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영양섭취도 제대로 못한 그들에게는 엄청난 피로를 가져다 주었다.
동팔이 먼저 방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모이자는 허술한 약속을 하고는
다들 방으로 돌아갔다.
준호가 먼저 준수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벌렁 누워버리자 준수가 침대 맡으로 다가와 앉으며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이제 말해줘야지?"
"뭘요?"
"네가 상훈씨를 조심하라고 했던 이유."
"아.. 그건 말이죠.. 사실 정답방에서 풀었던 문제는 수학문제가 아니었어요."
"나도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단순한 수학문제라고 하면서도 예민하게 반응하던 네 모습 말야.
아무리 문제가 어렵다고 해도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으니까."
"사실.. 문제가 마스터 H 의 이름을 맞춰라 였어요."
"뭐?"
"정답 화면에 죽은 진주누나까지 포함한 산장 멤버 전원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중에서
마스터 H 를 고르라고 했어요."
"말도 안되.."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 상황에서 모두에게 말해버리면 큰 혼란을 겪을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지하실에서는 서로를 믿고 도와야 빠져나갈수 있으니까요. 저도 엄청난 충격이었다구요."
"그랬구나.. 하지만 우리중에 H가 있단 말이야?"
"답을 입력할 수 있는 기회는 3번이었어요. 3번안에 맞추지 못하거나 시간이 초과되면 컴퓨터가
종료된다고 했어요. 그때 제가 제일 처음 누구의 이름을 써 넣었는줄 아세요?"
"누구?"
"형이에요."
"나?"
"네. 확인하고 싶었어요. 형이기 때문에 꼭 아니라는 답을 듣고 싶었어요."
"나라고 나올리가 없잖아."
"네. 역시 오답이더라구요. 형의 이름을 써넣은건 정말 미안하지만 저 기뻤어요. 오답이라는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사실.. H 가 우리중에 있을지 모른다고 계속 생각했었거든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냥요. H 가 너무 치밀하다보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한발 앞서 가잖아요
사실 료 형을 제일 많이 의심했어요. 우리말을 할때 발음이 부정확하긴 하지만 어휘력이 너무 뛰어나요.
마치 일부러 발음을 어눌하게 하는 것이라고 느껴질 만큼요.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점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두번째 답을 료형이라고 적었어요. 역시 아니더라구요."
"그럼.. 마지막 답을 상훈씨로 적은거구나?"
"맞아요. 자포자기였죠.. 하지만 막상 정답으로 나오니 자꾸 의심하게 되더라구요. 특히 음악방에서의
상훈형 행동은 평소의 침착한 모습과는 달리 충동적이었잖아요.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거에요.
조심하라구.."
"이상하네.. 답이 맞았는데 왜 상훈씨가 죽은거지?"
"그러니까요. 그것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어요. 이해하시죠?"
"네 말을 들으니까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너의 말을 두가지로 해석할수 있어.
첫째는 문제 자체가 모두의 믿음을 깨도록 유도했다는것. 예를 들어 세번째에 써넣은 이름은 무조건
정답으로 나온다던가 하면 그것 하나만으로 모두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수 있어. 그리고 두번째는.."
"이 모든게 저의 거짓일 경우.. 겠죠?"
"미안하지만.. 맞아."
"미안해할것 없어요. 저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요.."
"난 문제에만 너무 집착해서 그런지 몰라도 최대한 희생자를 줄이고 함께 살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기 때문에 한번도 일행중에 H가 섞여 들었다는 생각을 해본적 없어. 최소한 문제를 푸는 모습에는
거짓이 없었으니까."
"네. 죄송해요. 저도 상훈형이 죽고 나서 그 생각을 접기로 했어요. 역시 형 말이 맞아요."
"나도 한 가지만 묻자. 너 원래 기억력이 그렇게 좋니?"
"네.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좋아요. 아이큐도 높구요."
"아이큐가 몇이나 되길래?"
"고등학생때 마지막으로 측정한게 185였어요. 어렸을때는 조금 더 높았구요."
"아! 그렇구나? 굉장하다."
"기억력이 좋다는게 그렇게 좋지만은 않아요. 잊고 싶은게 있어도 쉽게 잊을수가 없거든요."
준호가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준수는 그의 갈색머리를 정성스럽게 쓸어 내려주었다.
준호는 머리를 쓸어주는것을 좋아했다.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하는 버릇 때문이다.
"나도 사실 지금에 와서야 고백하지만 네가 뜬금없이 상훈씨를 의심하니까 나도 널 잠시 이상하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전 후 사정을 들어보니 네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말은.. 저를 믿어 주신다는 뜻인가요?"
"나는 널 믿어.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야. 그러니 너도 이 일은 잊고 사람들을 도와줘. 그래야 무사히
빠져나갈수 있어. 알겠니?"
"네!"
"그리고 아이큐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처음에는 네 기억력이 어쩜 그렇게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아이큐가 그렇게 높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잘 아는 동생이 있거든?
독고 선 이라고.. 특이한 이름이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학년은 달라도 시험날은 같잖아?
난 항상 밤 새서 공부를 하는데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고민이었는데 그 녀석은 매일 놀러다니면서도
1등을 놓치지 않는거야. 그래서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녀석 아이큐가 170 이 넘더라구. 기억력이 워낙
좋아 수업 시간에만 집중해서 들으면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내용을 기억한데."
"독고 선.. 성은 거친 느낌인데 이름은 굉장히 부드럽네요. 부모님께서 이름을 잘 지으신것 같아요."
"나중에 소개시켜줄게. 얼굴도 잘 생기고 멋진 녀석이야."
"형보다요?"
"응?"
"아무리 멋지다고 해도 형보다는 못할거에요. 제 눈에는 그럴꺼에요~"
"그말 듣기 좋은데?"
"헤헤~"
"그만 삼천포로 빠지고 어서 자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면 자둬야 해."
"저 씻고 싶어요. 긴장해서 그런지 땀을 잔뜩 흘렸어요."
"그럴래? 그럼 같이 씻자. 내가 씻겨줄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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