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트의 내용은 사람의 이름인지 사물의 이름인지도 구분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아무래도 그림을 모두 찾아야 답이 풀릴듯 싶었다.
그때 동팔이 자신이 아는 그림이 있다며 준수에게 질문했다.
"제가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베아트리체에 대해서는 알것같아요. 이 그림 무지 예쁜 여자가
서있는 초상화 아닙니까? 입대전 인터넷에서 보고 반해버렸는데."
"맞아요. 베아트리체는 16세기 이탈리아의 귀족 딸이었어요. 미모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녀를 사랑하던
남자들이 많았는데 그중 그녀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베아트리체가 14세가 되자 그의 아버지가
욕심이 난 나머지 그녀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저택 구석에 가두어놓고 범해버렸죠.
그후로 그녀는 아버지에게 깊은 앙심을 품게되었고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던 집사의 도움으로 결국 아버지를 살해하고 말아요. 그후 16세때 그 일을 빌미로
심한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하지만 처형장에 있던 귀도 레니라는 화가가 죽기 직전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어요. 그게 그 유명한 베아트리체의 초상화죠. 그림에 신비한 힘이 있는지 아니면 그녀의
원한이 담겼는지는 모르지만 그 후 그녀의 초상화를 보던 사람중 일부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되요.
그것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하는데 예술 작품을 감상하던 사람이 정신을 잃고 쓰러짐을 뜻합니다."
"복잡한 사연이 있는 그림이군요? 아무튼 저 이 그림 알아요."
"여인의 그림이라..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준수씨도 참.. 이럴땐 왜 이리 둔한겁니까? 지금 우리중에 여자라고는 순화씨 하나 아닙니까?
그러니 순화씨 방에 숨겨져 있겠죠."
"설마요.. 만약 그랬다면 순화씨가 모를리 없었겠지요."
"제 생각엔 말입니다. 아마도 순화씨의 손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 숨겨져 있어 순화씨도 보지 못하고
넘어간것 같단 말입니다. 한번 가볼께요."
말은 그럴듯 했지만 정말 방에 숨겨져 있을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동팔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순화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을 뒤져 옷장 뒤에 감춰져 있던
베아트리체의 초상화를 꺼내들고 자랑스럽게 나타났다.
모두들 그의 추리에 박수를 보내며 칭찬했다.
"옷장 뒤에 숨겨져 있으니까 못봤죠. 그나저나 팔도 두꺼운데 이거 꺼내느라 꼬챙이질을 하도 했더니
어깨가 쑤셔 죽겠어요."
"하하.. 고생하셨어요. 동팔씨"
준수가 웃으며 동팔을 칭찬하자 칭찬에 약한 동팔은 금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에스텔 이라고 적혀있네요."
"에스텔요? 무슨 외국 여인의 이름인가? 하나같이 이상하네요."
"그러게요. 통 감이 안잡혀요."
준수와 료가 그림의 힌트를 보며 뜻을 몰라 중얼거리는동안 준호는 버릇적으로 재빨리 펜을 꺼내들고
종이에 힌트를 적었다.
"기억의 연속이 달리라는 사람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은 알것 같아요."
"준호가 네가 알고 있는 그림은 어떤 내용인데?"
"왜.. 약간 4차원 공간처럼 바다같기도 하고 사막같기도 한 배경이었는데요.. 시계가 물 흐르듯이
흐르고 있었고 나뭇가지에 젖은채로 빨래 널리듯 걸려있던 그림이었어요. 제 기억으로는요."
"그럼 달리의 기억의 연속이 맞아."
"그럼.. 그 그림대로 시계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시계 뒤에 감춰져 있다거나.."
준호가 시계를 지목하자 지하실의 기억이 떠오른 동팔은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다.
"거긴 없을꺼야. 아까 시계문을 살짝 옆으로 밀어봤는데 벽말고 아무것도 안보였단 말이지! 그리고
다시 그 문은 열고 싶지도 않다!"
"꼭 시계 뒤라고는 볼수 없어요. 시계가 저렇게 큰데 꼭 뒤에만 숨겼을리 없잖아요."
"그럼 다른곳이란 말이야?"
"시계 추가 움직이는 안쪽을 살펴봐야겠어요. 저 정도의 크기라면 그림 하나쯤 쉽게 들어갈수 있어요."
준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시계로 가까히 다가갔다.
금색 손잡이를 당겨 시계 추가 움직이는 문을 열자 마치 동화속 어린양들이 늑대를 피해 시계안으로
숨어들었던것 처럼 그곳에 얌전히 그림 하나가 놓여있었다.
기쁜 마음에 그림을 들어 잽싸게 쇼파로 가져와 내려놓으니 역시 설명대로의 그림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그림 좋아해. 뭔가 다른 차원이 느껴지면서도 고요하고 잔잔한 느낌을 줘."
"형. 감탄 그만하시고 글자를 보세요. 파라 옥시 라고 쓰여있어요."
"이번에는 파라 옥시네.. 역시 모르겠어."
"파라옥시.. 파라옥시..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던 단어인데.."
"옥시크린의 옥시 아뇨?"
"동팔형이 오늘따라 무지 예리하시네요. 그 옥시가 맞는것 같아요. 후후.."
준호가 왠일로 동팔을 넌지시 칭찬했다.
전날 준수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서로를 믿지 않으면 결국 자멸하고 말터.
우선은 억지로라도 서로간의 신뢰를 쌓는것이 중요했다.
"지금까지 나온 글자가 페, 안식, 에스텔, 파라 옥시죠?"
"거참.. 어렵게 해놨네."
"그림에도 순서가 있나봐요. 이것 만으로는 알아낼수가 없을듯 해요. 다시 그림을 찾아야겠어요."
"저것들로만 뜻을 만들자면 에스텔이라는 사람이 페(폐)가 안좋으니 안식을 취해야 한다..아닐까요?"
"하하.. 동팔씨도 참.. 그러니까 옥시(OXY) 즉 산소를 마시며 요양해야 한다는 거죠?"
"이를테면요."
"그것도 나름대로 말이 되네요. 동팔씨 다운 생각이에요."
료가 동팔의 말에 흥미를 보이며 웃었다.
늘 엉뚱한 말만 골라서 하지만 가끔 뒷발질에 쥐를 잡을때도 있다는것을 알고 있는 료는
그의 단어조합 상상력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남은 그림은 4개. 시간은 정오를 가르키고 있었다.
"역시 우리의 한계는 절반인가요? 왜 반만 맞추면 그 다음부터는 헤매는걸까요?"
동팔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탄하자 료가 한가지 그림을 가지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준수씨. 이중섭의 흰소에 대해서도 잘 알죠?"
"아뇨. 안타깝게도 이중섭 화가의 작품은 접해본 적이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가요? 그럼 제 기억대로 말해볼께요. 제가 한국에 처음 와서 본 동양화가 이중섭의 흰소 였는데
이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강한 느낌이에요. 소가 하얀색이라서 흰소가 아니라 살이나 내장 없이
몸이 뼈만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흰소에요. 마치 공룡 화석처럼 뼈밖에 없는 몸을 가진 소가 눈을
부릅뜨고 무섭에 서 있는 그림이었어요. 참 인상깊었죠."
"그렇군요."
"그림도 그림이지만 제목 선택도 센스있죠? 흰소라.."
료가 그림을 떠올리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들자 준호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질문했다.
"형은 동양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시네요?"
"말했잖아.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다구."
"그래도 대단해요. 우리나라 사람들 보다도 더 많은것을 알고 계시.."
"이준호!"
준수가 준호의 말을 막고 몸을 끌여당겨 어깨에 팔을 두른채 작게 속삭였다.
"어제 약속했잖아.. 사람들 의심하지 않기로.."
"미안해요.. 하지만 너무 정확히 알고 있다는 생각에 그만.."
"그러지마. 료씨는 너에게 나쁜 감정이 없어. 아니 오히려.."
"네?"
"아니다. 아무튼 다음부터 그렇게 직접적으로 따지고 들지마. 알겠니?"
준수는 말을 어설프게 끊은채 준호에게 충고했다.
말을 길게 이어갔다면 료가 준호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말도 나올뻔했다.
그런 말은 준호에게 말해줘봤자 자신에게 별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에 재빨리 말을 끊어버렸다.
준수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료가 말해준 흰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그림을 볼때 선이나 붓터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림에 내포 되어있는
내용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러다 문득 한가지의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손으로 짧게 무릎을 치며 말했다.
"노출이군요?"
"네?"
"노출이에요. 소의 몸에 가죽이 없다고 했잖습니까?"
"그랬죠."
"동물이나 사람의 몸에는 가죽 또는 살로 덮여져 있어 몸 안을 들여다 볼수 없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뼈만 남았다는건 몸 안에 노출을 의미하죠. 다르게 빗대어 말하자면 소는 산장을 뜻해요. 가죽은
산장을 가려 외부의 노출을 막는 그 무언가를 뜻하죠. 가죽이 없어 뼈가 훤히 들어났듯이 산장에도
이것이 없으면 내부가 고스란히 노출되요. 뭔지 아시겠어요?"
"산장 전체에 쳐 있는 커튼 말인가요?"
"네. 그런것 같아요. 우리가 산장에 처음 왔을때부터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진주씨가 죽은 이후에 한번
살짝 열어보곤 그 누구도 열어보지 않았죠?"
"그거야.. 1층 거실의 창이 워낙 크니까 왠지 열어놓기 뭐해서 그랬죠. 햇빛도 싫고."
"그거에요. 발코니가 크면 클수록 외부에 노출되는 면적도 늘어나죠. 이게 그림의 의미에요."
준수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서 현관문 양쪽으로 넓게 자리잡은 커튼을 모두 열기 시작했다.
그동안 얼마나 닫혀 있었는지 뽀얀 먼지가 가득해 기침을 유발하며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또한 크기도 만만치 않고 뻑뻑해서 잘 열리지도 않았다.
"역시.. 있네요. 생각보다 훨씬 강한 느낌의 그림이로군요."
식당의 입구와 통해있는 제일 오른쪽 커튼을 젖히자 그림은 주인을 기다리듯 얌전히 놓여있었다.
준수는 그림을 집어들고 제일 먼저 오른쪽 구석을 살폈다.
이번 글자는 논 이었다.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것 같았다.
그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가며 끙끙거리고 있는사이 순화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도자기를 깨트리고
휴지를 풀어 온통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가 하면 컵에 물을 담아가지고 나와 여기저기 뿌리고
돌아다니는 등 사고를 치고 있었다.
준호는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답에 대해 생각하랴 뒷처리하랴 몸이 열개라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형! 밀레의 만종 있잖아요. 아까부터 계속 생각해봤거든요?"
"그러니? 말해봐."
"그 그림이 부부가 밭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그림이잖아요?"
"그렇지. 수확을 마친 부부가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니까."
"근데요. 제가 만종에 대해서 조금 다른 해석을 들은적이 있거든요? 원래 형 말대로 감사기도를 하고
있는 부부의 그림인데 원래 밀레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해요."
"또 다른 뜻이 있다는거니?"
"만종은 원래의 뜻인 안젤루스(Angelus) 의 뜻을 한자로 번역해서 저물 만 쇠북 종 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인데요. 쇠북 종은 쇠로 종을 치면 아이가 운다.. 라는 뜻이 있어요.
즉 만종에는 아이의 울음이 저물었다 - 죽었다. 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거죠. 그 말이 나온 이유가
그림안에 있는 여자의 발밑 바구니 때문인데요. 그 바구니에는 지금처럼 감자가 아니라 아이의
시체가 담겨 있었데요. 밀레가 처음 그림을 그려서 친구들에게 보여줬는데 한 친구가 아이의 시체를
보더니 미술계의 비판이 우려된다며 말렸데요. 밀레는 이삭줍기같은 평화로운 그림을 그리던 사람
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아이 시체 대신 감자로 바꿔 그린거래요. 그러니 수확에 감사드리는 부부의
모습이 아니라 원래는 아이가 죽어 슬퍼하는 마음으로 묻기전 천국으로 가기를 바라는 내용이란
이야기죠. 뭐..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라 확실하진 않지만요."
"그거.. 뭔가 느낌이 온다. 죽은 아이라.."
"제 생각에는요. 죽은 사람을 두고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를 가지고 보면 진주누나밖에 생각이 안나요.
죽기 직전까지 사자성어를 밝혀가며 우리를 도와줬던 누나잖아요. 비록 시체는 벌써 치웠는지 사라져
버렸지만 여전히 누나의 방만 보면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싶어지니까요."
"역시. 나도 같은 생각이 든다. 한번 올라가보자."
준수 준호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진주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순화의 방과는 달리 숨겨지지도 않은채 진주의 시체대신 그녀의 침대위에
그림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H 가 이런 생각을 한것을 보아하니 밀레의 아기 시체설이 그렇게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닐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그림에 쓰여있는 힌트의 글자는 향산 이었다.
준호는 자꾸 눈에 익은 글자가 나오자 하나로 연결해 떠올리려고 애썼다.
"더 이상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냥 산장을 샅샅히 뒤져볼깝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렇게라도 해봐야 할것 같아요."
"그럼 흩어져서 찾아봅시다. 근데 순화씨는 해결하고 시작하죠."
"어떻게 해요. 묶어둘수도 없잖아요."
"우리가 신경 못쓰는 사이에 사고를 칠지도 모르니까 순화씨 방에 날카로운 물건들을 치우고 잠시
들여 보내야겠습니다. 순화씨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수 없네요."
"열쇠가 없어서 문을 잠그지 못하는데 열고 나올수도 있잖아요."
"문이 밖으로 열리는 구조니 문을 닫고 줄로 고리를 잡아당겨 맡은편 상훈씨 방 문고리에 팽팽하게
묶어두면 어느정도 해결이 될것 같아요. 그렇게라도 합시다."
동팔의 제안에 모두들 반박하지 않았다.
순화는 점점 상태가 심해지는것 같았다.
얼굴에 침까지 흘려가며 실실거리는 그녀는 도처히 어른이라고는 볼수 없었다.
료와 동팔이 순화를 번쩍 안아올려 방으로 데리고 가자 순화는 찢어지는듯한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다.
그들도 이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대로 두면 위험할것 같아 어쩔수 없었다.
내보내달라고 통곡을 하며 문을 두들이는 순화를 뒤로 한채 네명의 남자는 서둘러 산장을 샅샅히
뒤지기 시작했다. 허기가 지거나 목이 마르면 잠시 식당에 들어가서 각자 해결하는 방법을 써가며
날이 저물때까지 내부를 쥐잡듯 뒤졌지만 그림은 바늘이라도 되는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밤 8시가 되자 모두들 지쳐 포기하고 다시 쇼파로 모여들었다.
"젠장! 초등학교때도 귀찮아서 하지 않았던 보물찾기를 여기까지 와서 하고 자빠졌네! 이게 뭔
지랄같은 짓이야! 나 참.."
동팔이 욕을 해가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료는 그림이 나타나주질 않자 점점 초조해졌다.
좋게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시간이 다가오자 생각과는 달리 마음이 다급해졌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그는 산장 밖으로 나가 빙 둘러보았지만 그곳에도 그림은 없었다.
준호는 지쳤다는 표정으로 준수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의 특유한 냄새가 코를 찌르며 기분좋게 전해져왔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던 준호는 자신이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번쩍 눈을 떴다. 그런데 그의 눈은 문득 위로 고정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한곳을 가리켰다.
"형들! 천장을 보세요!"
준호의 말에 준수 료 동팔 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의없게도 그림은 천장 구석에 바짝 붙은채 모두를 조롱하듯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팔은 기가 찬다는듯 혀를 찼다.
"이제 별 방법을 다 쓰는구만? 저런 곳에다가 붙여 놓았단 말이지?"
"웃음밖에 안나오네요. 천장이 높아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것을 예상했나봐요. 결국 맞아 떨어졌네요.
등잔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헛튼 말은 아닌가봐요."
"저걸 어떻게 꺼내죠?"
막상 그림을 발견하긴 했지만 떼어낼수가 없었다.
산장의 천장은 1층 2층으로 구분되어져 있는게 아니라 오페라 극장처럼 하나의 높은 천장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왕이나 높은 귀족들이 앉는 특등석처럼 2층 방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돔 형식으로 되어있는 천장은 2층 난간에서 팔을 뻗어도 절대 손이 닿지 않는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그림을 떼어 낼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준수씨. 저 그림이 무엇 같나요?"
"잘 보이진 않지만 크기로 보나 복잡한 색감으로 보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떠오른건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같은 그림은 천장화로 많이 사용되는
그림이에요. 왜 진작 천장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요."
"그나저나 어쩌죠? 저 그림을 떼어낼 방법이 없으니 힌트도 알수 없잖아요."
"정말 곤란하네요. 마치 이번 힌트는 버리라는 말 같아요."
H 는 치밀하고 빈틈이 없지만 때로는 이렇게 간사한 면모를 보였다.
문제를 살짝 비틀어 놓는다던가 분명 힌트를 남겼음에도 지금과 같이 손에 넣을수 없는 그림의 떡으로
만들어 버려 사람을 열받게 한다던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못먹는 감 쳐다보듯 하던 네 사람이 고개가 아플때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오후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료가 서둘러 사람들을 재촉했다.
순화도 지쳤는지 문을 두들기는것을 멈춘채 깔깔대며 혼자 웃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네요. 답을 조합하는것도 어려울텐데.."
료가 초초한 얼굴로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자 준수가 입을 열었다.
"뭉크의 절규는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다들 아실꺼에요. 형체가 불분명한 남자가 양 뺨을 손으로
움켜잡은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듯한 그림이에요."
"혹시.. 그 그림 스크림에 나왔던 살인마같은 얼굴 아닌가요?"
"맞습니다. 동팔씨. 비슷한 형상의 그림이에요."
"아!"
동팔이 꽤나 적절한 표현을 하자 준호와 료도 알것 같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림의 제목은 절규.. 그들은 생각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준수는 문득 스치고 가는 생각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이거.. 말이 안 될수도 있는데요.. 혹시 그 그림 지하실에 있는거 아닐까요?"
"네?"
"절규하는 그림을 떠올려보세요. 그림안에 힌트가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앞에서 절규의 비명을 지른
사람은 단 한사람밖에 없어요."
"상훈씨 말인가요?"
"네. 진주씨는 활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기 때문에 비명같은걸 지를 틈이 없었죠. 하지만 상훈씨는
몸이 얼어붙으면서 끔찍한 비명을 질렀잖아요. 우리가 산장에 들어와서 그런 비명을 들은건
그때가 처음이구요."
"준수씨! 그럴듯해요. 아무리 뒤져도 산장 안에 그림이 없는것으로 보아 가능성 있는 말이네요!"
"그럼 들어가볼까요?"
"전 싫습니다! 그 넓이 뛰기를 또 하란 말입니까?"
동팔이 질색하고 나서자 준수는 따라 들어가지 않아도 좋으니 문 여는것만 도와달라며 그를 달랬다.
동팔은 나름대로 고민하고는 몸을 일으켜 시계를 맞추고 문을 밀기 시작했다.
네명이 달라붙어 힘겨루기를 하자 다시 시계의 문이 열렸고 끔찍한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계단이
눈앞으로 가득 펼쳐졌다.
준수는 준호를 입구에 세워둔 채 료와 같이 안으로 들어섰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화면도 꺼져있었고 문도 잠기지 않아 쉽게 열렸다.
여전히 어두운 조명에 눈이 아팠지만 문을 열자마자 방 한가운데 그들이 애타게 찾던 그림이
반가운 모습을 드러냈다.
준수는 서둘러 방의 바닥을 내리쳐봤지만 함정이 작동되지 않는듯 바닥은 열리지 않았고 혹시라도
질소가스가 새어나올까 염려한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림을 집어들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무사히 그림을 가지고 산장으로 되돌아온 준수와 료는 그림을 내려놓고 힌트를 읽었다.
뭉크의 절규 안에는 벤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글자가 페 - 안식 - 에스텔 - 파라 옥시 - 논 - 향산 - 벤 이렇게 7개입니다.
천지창조에 있는 글자를 알수 없으므로 이것만을 가지고 답을 맞춰야 한다는거에요. 순서 힌트가
뭐였죠? 불러주실래요. 동팔씨?"
"네. 그들의 그림을 묶어 한권의 책으로 낸다면 이렇게 표기할 것입니다.. 라고 씌여있네요."
동팔이 힌트를 큰소리로 불러주자 료가 웃으며 말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알아낸것처럼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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