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내 부친이 분명하건만, 이른 시각 안동 출장길에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한참 전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가족과 친지들에게 공언했다. 큰 고모를 제외하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폭포수처럼 한시간여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눈물의 의미를 나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흘릴 눈물이 1g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이다.
뭐지 도대체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깨를 덮은 펄럭한 런닝, 흰바탕에 파랑색 세로줄 꽈배기 모양이 선명한 나일론 파자마를 입은 아버지가, 양쪽 발 위에 7살 남짓한 내 발을 올리고, 내 양손을 잡은 채 걸음마 놀이를 해주고 계셨다.
좋았던 기억이라고는 장난감 권총 한번 사준 것 외 없는데, 어제 일처럼 선명한 이 그림이 갑자기 왜 그려진 것인지, 멈추지 않는 눈물 속에서 그 의미를 스스로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사 철두철미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모든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있었고 정돈된 상태였다. 어려서 친척 집에 놀러갔을 때, 이모부가 ‘쓰메끼리’ 어디 갔냐고 사촌에게 물었을 때 난 의아했다. ‘쓰메끼리’를 포함 모든 물건은 항상 약속된 장소에 있었다.
아버지는 개신교(성결교)에 심취하셨고, 그 바람에 유감스럽게도 난 모태신앙이다.
개인의 삶에, 가정에, 종교는 副가 되어야 했건만, 主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구도자의 자세를 넘어, 마치 선지자를 지향하는 듯 했다.
물도 안 먹는 일주일 금식기도는 허다했고, 최장 40일간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방법이 철저하다 못해 처절해질수록 가정은 피폐해졌다.
가나안 땅을 향한 모세의 율법은 가족 구성원에게 지독한 행위규범으로 작동했다. 처음에는 꽤나 객관성을 띄던 것이, 점차 변모 변질되면서 개인의 삶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우상숭배일 수 있으니 ‘국기에 대한 경례’를 금한다. 율법 준수의 일환으로 창피함을 무릅써야 하니 삭발을 한다. 모두 국민학교 저학년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급기야 세상의 권세와 물질은 신기루 같은 것이니 학업을 중단하고 노동을 통해 취득한 금전을 모두 교주에게 바치기 시작했다.
국민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가죽 옷 제조공장에 들어갔다. 부서는 재단반, 봉제반, 완성반으로 구성되고 봉제반은 앞판, 뒤판, 소매, 시보리, 검수 과정을 거쳤는데 난 그중 미싱대 앞에서 보조를 맡은 뒤판 ‘시다’였다.
‘노동’인지 ‘놀이’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가죽에 본드를 칠하고 망치질하기를 계속했다. 아침8시30분부터 저녁7시30분까지 토요일은 오후3시에 마쳤다.
이사를 하면서 일반 의류 제조공장으로 옮겼는데 전체 인원이 100명 남짓으로 규모가 꽤 컸다. 거기서도 봉제반 시다를 하다가, ‘시다반장’이라고 해서 ‘반장’은 아닌데 재단반과 봉제반을 오가며 심부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함께 일하던 누나들(소위 공순이)의 삶은 지금 생각하면 눈물겹다.
누나들이라고는 하나, 시골에서 국민학교 졸업하고 상경한 10대 중반이 대부분이었고 10대 후반이면 어른 대접을 받았다. 기숙사 방 하나를 4~5명이 사용하고, 월급이 4만원 안팎인데 월 3천원~5천원 정도를 쓰고 나머지는 전부 고향집으로 보냈다. ‘아모레’ ‘쥬단학’ 아줌마가 화장품을 파는데 할부로 샀다. 화장품이라고 해봐야 스킨도 드물고 로션이 거의 전부다. 색조화장을 하는 누나는 딱 1명 봤다. 거의 1960년대 중후반 생들이다. 100원 ‘폴라포’나 50원 ‘크라운 산도’에 행복한 미소를 짓던 누나들이다. 참으로 웃프다. 노동인지 게임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신나게 미싱를 밟고, 오바로크를 쳤다. 야간 작업도 부지기수였는데, 철야를 할 때는 박카스를 줬고 졸음 방지용으로 ‘타이밍’이라는 약도 먹었다. 영양제인 줄 알았다.
대형트럭이 원단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 재단반, 완성반 형들이 총동원된다. 원단은 단위가 ‘야드’다. 그런데 원색이 대부분인 영어로 된 이 ‘색상’을 읽를 수 있는 사람이 부장님, 중졸 경리누나, 입대를 앞두고 잠깐 알바중이던 재단반 고졸 형 3명 뿐이다. 형들이 무거운 원단을 들고 라벨을 그 입대 전 고졸 형에게 보여주면 그 형이 읽는다. “레드 84” “옐로우 70” “네비 55” 충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덴뿌라 장사’를 하게 되었다.
오뎅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는 ‘어묵’이다.
키가 작아 발이 간신히 닿는 짐자전거 뒤에 큰 양은 다라이를 얹고 그 안에 덴뿌라를 1,000장 넘게 실었다. 어린 나이에도 장사를 꽤 잘했다. 당시에는 형편들이 넉넉지 못해서, 도시락 반찬으로 품질은 조악하지만 가격이 저렴한 덴뿌라가 인기였다. 집에서 시장까지 편도 7km거리였는데, 다음날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 빼고 주 6일 장사를 2년여 했다. 중간에 고개가 있었는데 끌고 올라가기가 버거워 한두번을 쉬어야 했다. 물론 하루 수익 거의 ‘대부분’을 매일 헌금했다. 헌금의 액수와 믿음 내지 하나님께 가는 길은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삥땅은 이틀에 330원이 전부다. 은하수 담배 1갑이다. 동네 껄렁한 애들에게 맞지 않으려고 시작한 담배가 이미 인이 배겨 끊을 수가 없었다.
장사를 하면서 또래 아이들이 등하교 하는 모습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노점 단속을 나와 생선리어카, 과일상자 등이 난장판으로 부서져 나갈 때, 대머리지만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노점상들에게 가게 앞자리를 폭넓게 허용했던, ‘삼성전자 대리점 사장님’의 “적당히 그만하라‘는 한마디에 그 무서운 단속반들이 조용히 물러서는 모습을 보고 엄청나게 놀랐다. 권력이었고 진정한 힘이었다.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는 동안, 살림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절반 정도 신자였던 엄마는 우리 남매들을 걷어 먹이기 급급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 공부도 곧잘 했건만 학교에 올 엄두를 못냈다. 몇학년인지는 알아도 몇반인지는 몰랐다. 한숨과 눈물로 점철되었던 엄마의 고단했던 삶은 나도 가늠하기 어렵다.
조숙했던 나는 16살 때 아버지와 담판을 했다.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무수히 폭력을 행사했던 아버지는 더 이상 때리지 못했다. 서로의 길이 다름을 인정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살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말아라“고 당부하셨다.
가출을 했다. 공부하기 위해서. 그 것만이 내가 살 길이었다.
기숙사가 있는 보급소에서 신문을 배달했다. 짬밥이 적은 나에게는 무려 일 380부가 배당되었다. 광고지가 너무 많아서 신문이 접혀지지 않았고, 2번 나누어서 배달했지만 매일 땀으로 범벅이었다. 새벽에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아침은 굶고 점심 저녁은 보급소에서 먹었는데, 정말 허기지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쩌다 같은 반 형이 사주는 시레기국밥은 꿀맛이었지만, 자존심이 강해 그마저 거절했다. 학원앞 포장마차의 토스트 굽는 버터 냄새는 코를 찔렀지만, 한번도 사먹지 못했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돈 100원 절실한 시절이었고, 무학력의 외톨이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멸시, 조롱, 천대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내 인생 가장 혹독한 시기였으나 무던한 척하려 했다. 17살에 중입(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마쳤고, 18살에 고입 검정고시를 마쳤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