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자동차공업 광주공업단지 기공식
아시아자동차공업의 시작은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정한 자동차 공업 보호 육성법에 기인하여 설립됩니다. 1964년 12월 21일, 설립전 미리 기술, 자본 확보를 위해 이탈리아의 피아트, 프랑스의 SIMCA, 그리고 프랑스 SIAVE 은행과 차관, 기술 제휴 협정을 채결하게되죠. 이듬해인 1965년 7월 2일 전라남도 광주의 호남 연고 기업인인 이문환에 의해 자본금 총 8억 2천 8백만원에 설립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공업단지 기공식을 열었고 외자, 1천5백50만 달러와 내자, 8억4천만원으로 건립된 공장은 연 8천대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피아트 124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이때부터 아시아자동차는 군납용, 내수와 수출 차량 생산을 당담하게 되죠. 그러나 1969년까지 완성차 생산을 못해 경영난에 허덕이는 바람에 동국제강에 인수되게 됩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대망의 첫 승용차인 피아트 124를 1970년에 출시, 같은 해 하반기에는 프랑스 SIMCA의 상용차 전문 브랜드 UNIC의 8톤 트럭과 피아트에서 들여온 차체로 생산하는 P9AK 프런트 엔진 버스 생산을 위해 계약을 채결합니다. 당시 현대가 유럽 포드와 제휴관계였고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와 제휴관계이였으며 하동환자동차가 일본 닛산디젤과 제휴관계였던걸 생각하면 국내에서는 드물게 남유럽 국가 기업과 제휴선을 둔 회사였습니다. 거기에 운수업자들을 서울에서 초청, 광주공장시찰을 하여 이미지 메이킹에도 주력하게 됩니다. 이어 고속버스 업체들이 일본에서 직접 수입하던 미츠비시 후소와 기술제휴, 고속버스를 라이센스 생산과 판매를 맏게됩니다.
堅固하고 경제的인 승用車 Fiat 124 安락 高速 安全
1피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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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시아자동차는 또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는데 피아트 124가 워낙 유럽에서 잘팔린 차였기에 원자재 납품이 지연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 아시아자동차는 손해를 엄청 보게됩니다. 거기에 고속버스는 미츠비시의 선진 기술과 높은 완성도로 잘팔렸지만 P9AMC의 점유율을 그렇게 높지 않았고 대형 트럭의 경우 너무 낡은 기술에 엉성한 디자인으로 외면받게 되었고 75년 군납용으로 K100 지프차를 개발하지만 1976년 기아산업이 인수하게 됩니다. 웃긴건 기아산업이 무리하게 인수하다가 자기도 망할번 했죠.
大型(대형), 大重(대중), 高速輸送(고속운송)의 주역
아시아 8톤카고트럭!
어지되었던 이번 시리즈는 아시아자동차가 프랑스 UNIC(유니크)와 기술제휴로 생산한 차량에 대해 적을까 합니다. 당시 국내 대형차 시장에서는 현대가 생산한 포드 트럭과 신진자동차(타타대우의 전신)가 생산한 히노 트럭이 있었는데 이들도 약간 엉성한 면이 있었으나 캡의 디자인에서나 효율성에서나 아시아의 유니크 트럭이 가장 떨어지게 됩니다.
유니크가 망한 이후 팬들이 유니크를 수집해 세운 작은 박물관
이차에 대해 설명하기전 먼저 이 유니크라는 회사의 역사들 살펴봅시다. 유니크는 1893년 설립된 유서깊은 회사로서 자전거와 자동차를 생산하던 회사였습니다. 설립자인 조지스 리샤는 처음에는 벤츠에서 만든 3.5마력 엔진을 자기가 만든 차체에 탑재했는데 이차로 1898년, 마르셀-니스 구관을 주파하는 자동차 경기에 출전, 우승하게 되죠. 이후에는 여러 우수한 엔지니어들과 함께 경주용차를 제작해 파리-마드리드 경주에 직접 참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레이싱은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행위였고 르노그룹 공동 창립자중 한명인 마르셀 르노는 사망, 같은 경기에 참가했던 조지스 리샤도 큰 부상을 입게되지요. 그리하여 병실에서 머물며 조지스 리샤는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근데 뜻밖에도 부상당한 조지스 리샤를 세계의 부호 가문중 한명인 앙리 드 로스차일드 남작이 방문하게 됩니다. 그는 조지스한테 투자를 제안하게되고 조지스는 그걸 받아들였죠. 그리하여 충분한 자본금을 얻게된 조지스는 오랜 친구이자 부유한 사람인 앙리 하몬에게 경영을 맡기게 됩니다.
창립자인 조지스 리샤 (운전석쪽)
하몬은 1921년 프랑스 레발루아의 한 창고를 구매하고 많은 소비자를 얻을수 있는 내구성 높은 차 생산을 고안하던중 자가용차 뿐만 아니라 영업용 생산도 결단하게 됩니다. 다만 처음에는 택시만 생산했죠. 생산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부품 통일을 추진, 라이에이터, 시동 이그니션, 기화기, 변속기까지 모든 모델에 같은걸 장착하게 됩니다. 이러인해 1922년에는 회사 첫 트럭인 M5C 3톤 트럭을 생산하게됩니다. 그와중 창업자인 조지사가 불이의 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회사 경영진이 교체되고 1930년에는 파리 모터쇼에서 프랑스 첫 대형 디젤엔진을 선보입니다. 물론 이는 벤츠가 생산한 디젤엔진의 라이센스 생산품이였지만요. 거기에 1933년에는 3톤에서 15톤까지 라인업을 확장, 프랑스에서 상용차 생산업체라는 이미지를 갖추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발발전까지 계속해서 메르세데스-벤츠와 기술제휴로 디젤 엔진을 생산하던 유니크은 2차 대전, 프랑스 정부가 상용차 생산업체를 통합하여 Groupement Francais de l'Automobile(프랑스 자동차 통합조치)이라는 그룹에 들어가였다가 전후 1951년 해체되어 나오게 됩니다. 그와중에서 독일 나치한테 점령당해 생산을 중단당한 경험도 있지요. 웃긴건 같은 자동차 회사인 르노는 나치에 부합했다가 욕처먹고 전범기업으로 낙인 찍히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혼란속에도 굳건했던 유니크은 1947년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유니크의 후원자였던 로스차일드 남작
바로 후원자였던 로스차일드 남작이 사망하고 몇일후 회사 창업자를 승계한 회사 총책임자까지 죽어 경영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때 회사를 구원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SIMCA의 경영자인 앙리 티어도어 피야지였습니다. 그는 회사를 인수하면서 설비와 기술에 투자한다고 약속했지요. 그로 인해 1952년 SIMCA는 유니크을 인수, SIMCA 자동차의 상용차 자회사가 되게됩니다. 그러나 UNIC은 여전히 경쟁사들에 비해 뒤쳐젔고 이탈리아 피아트의 기술을 들여와 생산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리하여 피아트의 자본이 유니크에 흘러가게 되지요. 즉 피아트가 유니크의 주식 상당수를 보유하게 됩니다. 유니크는 당시 프랑스 국방군에 군용트럭을 납품하던 회사였는데 다시 말하면 피아트의 기술로 군용차를 생산하거나 마찬가지가 되죠. 그 때문에 프랑스 정부와 국회가 상당히 반발하게 됩니다. 프랑스 정부가 이탈리아 회사에서 생산한 차량을 인수하기를 거부했거든요. 물론 차량은 프랑스에서 생산했지만 엔진은 이탈리아에서 제조되었고 유니크은 이미 피아트가 대주주였으니까요. 당시에는 유럽 연합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수주의가 상당했기 때문에 "군에 납품되는 장비의 모든 부품은 프랑스에서 제조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니크은 "비록 엔진은 이탈리아산이지만 생산은 프랑스에서 하기 때문에 프랑스차이다!"라는게 먹혀 겨우 정부에 납품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1975년 이베코가 설립되면서 피아트는 자회사로 가지고 있는 모든 브랜드를 통합시켰고 유닉은 1985년에 완전히 사라지고 법인마져 1992년 완전히 소멸되어 유니크의 약 100여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총중량 38톤급 유니크 Izoard 270 트랙터. 국내에서는 CP(Cargaison Piste 트랙터 트레일러) 트럭으로 불린것으로 추정
그러면 이 유니크의 트럭은 도대체 어떤차냐? 역사적 배경을 집느라 조금 길어졌지만 차량 설명도 소홀하지 않도록 한번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정확한 명칭은 유니크 Izoard 270 입니다. 최대 적재량 8톤부터 총중량 35톤의 트레일러까지 대응 가능한 모델이였죠. 8톤 모델의 경우 따로 T8 AMC라고 불렸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유닉은 피아트의 기술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피아트의 캡 디자인 기술을 전수받아, advancedin(혁신적 캐빈)을 도입했죠. 이 캡 디자인의 원형이 되는 피아트 690은 1960년에 생산된 차량이여서 이미 개발된지 7년이 지난 디자인이였습니다.
유니크 Iozard 270의 프레임과 서스팬션
다만 프레임은 유니크에서 이미 개발한 프레임을 그대로 이용했고 오래되었지만 캡도 틸팅캡 방식에 유니크에서 보안 및 변경후 출시했습니다. 거기에 피아트와는 다르게 오로지 가격 경쟁력과 생산 단순화를 위해 헤드라이트와 그릴의 디자인도 아주 단순히 마련하는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그리하여 1967년에 출시하게 되지요. 폭은 2.5m, 전고 2.76m의 Izoard 270은 프랑스에서는 시장 반응이 괜찮을지는 몰라도 1970년 대한민국의 상용차 시장에서는 약간 오래된 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프랑스에서는 노후화된 디자인인걸 감안, 피아트 디자인의 새로운 캡을 70년대 초반 선보이게 되지요. 그러나 국내에서는 1978년 단종까지 같은 캡을 사용했습니다.
M62S V8 엔진
엔진은 유니크 M62S V8 엔진을 탑재, 10,766cc로 270ps/2,600rpm에 84kg*m/1400rpm의 토크를 발휘했습니다. 8톤용에는 조금 출력이 낮은 버젼이 장착되었지만 정보가 없는 관계로 대형 트랙터 기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엔진은 직분사 OHV 디젤 엔진으로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각 뱅크의 4개의 실린더 해드중 로커 커버를 2개식 분리해 장착한 특징이 있지요. 직경은 119mm, 내경은 121mm으로 롱 스토로크 엔진이였습니다. 즉 반응이나 속도 보다는 내구성, 토크를 중시한 디자인이죠. 압축비는 17:1이며 오일 윤할 방식은 웨트섬프 방식이였죠. 미션은 기본 6단이였지만 싱크로메시가 들어간 8단, 그리고 트랙터 버전은 10단 미션도 존재했고 거기에 미국 상용차 회사인 Mack(맥)의 엔진을 장착하는것도 가능했습니다.
8톤 프레임의 T8 AMC 트랙터
당연히 미츠비시 후소의 F 시리즈 트럭을 들여온 현대나 이스즈 뉴파워 Z 생산을 개시한 GMK(새한자동차)에 비교하면 심각하게 경쟁력이 떨어졌죠. 워낙 안팔리는 바람에 남아있는 정보도 거의 없고 사진도 광고를 제외하면 알려진바가 없습니다. 같은 피아트 계열 버스인 P9AMC는 나름대로 팔렸고 B909S는 고속버스 시장을 재패할 정도의 점유율을 보인것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의 존재감이였죠. 만약 기아산업이 기술제휴선을 히노자동차로 변경하지 않고 계속 피아트와 유지했으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후 유니크는 상당히 디자인면에서 혁신을 이루었고 이후 이베코로 통합되게 되니까요. 웃긴건 나중에 수입산 트럭을 판매할때 아시아자동차는 스카니아를 들여왔고 오히려 한라에서 이베코를 들여오게 됩니다. 과거 피아트와 거래한것이 있는것 만큼 이베코를 들여오는게 더 수월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지되었던 스카니아를 들여왔죠. 어쨌든 1978년 히노차의 라이센스 생산으로 인해 아시아자동차는 유니크와는 물론 피아트와도 결별하게 됩니다.
재미있었으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
아버지가 아시아자동차 다니셨죠...
피아트 연수도 다녀오시고...
집에 내려가면 물어봐야지...
님덕분에 아버지 역사를 물어볼게 생겨서 감사합니다. ^^
혹시 위에 형상의 3축 트랙터(영상에 나오는 트럭)을 아시아차가 생산했는지 궁금하네요. 그차가 CP 트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버지 연세가 많으셔서 귀가 어두워지셔서 전화통화가 어렵네요... ^^;;
제 기억으로는 80년도 이후에 퇴사(제가 국민학교 3~4학년때)하셨거든요...
UNIC P9A 차종의 상세한 제원표 입니다. 저기에는 의외로 4기통 5,980cc 엔진이라 적혀네요.
여담이지만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한 UNIC 트럭 외에도, 1990년대 초반에 한참 수입트럭 열풍 불기 시작할적에 르노 R시리즈 6x4 트랙터가 한국서 잠시 판매된 적이 있었습니다. 효산특장차 라는 업체에서 수입해서 정식발매 했지만,판매 부진으로 얼마 팔지 못하고 철수하였죠.
웃긴건 엔진이 다른데도 압축비는 동일하군요
르노 R시리즈도 팔았는건 몰랐네요. 제원표가 제가 불어가 조금되서 약간 이해가 되네요 ㅋㅋ 5단 싱크로 미션이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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