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쉬(Crash)’는 LA라는 미국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인종편견의 실상과 상처를 그렸다. 우리가 어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때로 다른 인종 다른 계층에게 불만과 분노를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건 죄악이고 그런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영화는 그런 무의식 혹은 현실에 연관된, 그러나 밖으로 끌어내기 쉽지 않은 편견 불만 분노 폭력을 화면 가득 쏟아낸다.
이렇게 말하면 영화가 대단히 심각하고 불쾌한 내용으로 가득할 것이라 예상하겠지만, ‘크래쉬’는 다양한 인종과 계층들이 서로 관계하고 부딪치는 모습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풀어낸다. 마치 영화 ‘매그놀리아’에서처럼 별 상관없어 보이는 각각의 인물들이 결국에는 전부 조응하게 되는 방식과도 비슷한데, 짜임새 있으면서도 독특한 이야기들이 꽤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국내에는 아직 개봉되지 않았으나 미국 영화평론가협회에서 ‘2005 최고의 영화’에 뽑았을만큼 작년 미국 개봉시 논란과 함께 꽤 큰 반향을 일으켰다.
LA의 어느 도로에서 추돌사고로 백인 여성과 동양인 여성이 서로 말싸움을 하고 있는 중에 흑인 형사 그레이엄(돈 치들)은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찾아 길 옆으로 다가선다. 갑자기 시간은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LA의 유명한 검사인 릭(브랜든 프레이저)과 그의 아내 진(샌드라 불럭)은 백인들이 주로 찾는 쇼핑가를 들린뒤 자신들의 차에 탔다가 두명의 흑인 권총강도에게 차를 탈취당한다. 이들은 차를 서로 떠들며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그만 길 옆에 서있던 한 한국인 남자를 치고 만다. 그들은 그 남자를 병원에 데려다 놓고 도망친다. TV 프로듀서인 캐머론(테렌스 하워드)과 그의 아내 크리스틴(탠디 뉴튼)은 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도중에 흑인 권총강도가 탈취한 차와 같은 차종을 몰고 있다는 이유로 백인 경찰 잭(맷 딜런)과 토미(라이언 필립)에게 검문을 당한다. 잭은 이 부부가 차에서 불온한 행위를 했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일부러 과잉수색을 하고, 크리스틴에게 심한 모욕을 준다. 이 부부는 자신들이 흑인이기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참고 위기를 모면한다. 토미는 고참인 잭의 이런 행위를 견딜수 없어 상부에 파트너를 바꿔달라고 요구한다. 한편, 아랍계로 오해받는게 항상 불만인 한 페르시아계 가족들은 권총을 구입해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려 한다. 이 가게의 열쇠를 고치러 온 멕시코계 남자는 가게 주인과 말다툼을 벌인다.
이 영화 초반부에 백인과 흑인간의 사회적 갈등을 표현하는 소품으로 자동차가 등장한다. 백인 검사 부부가 타고가다가 강탈당하는 차, 그리고 같은 종류의 차량을 타고 가다가 경찰에게 치욕을 당하는 흑인 프로듀서 부부가 타는 차로 나오는 링컨 내비게이터(Lincoln Navigator)다. 내비게이터는 포드의 고급차 브랜드인 링컨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고급 SUV이다. 호화로운 외관에 널찍한 실내공간을 지닌 풀사이즈 SUV로,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와 함께 돈 많은 흑인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영화 속에서도 성공한 흑인 프로듀서 부부가 고급 파티에 다녀올때 사용하는 차로 등장하고 있는데, 검은색 내비게이터는 실제로도 그런 용도로 즐겨 사용된다. 또 LA지검의 인기 검사 부부가 타는 차도 마찬가지로 검은색 내비게이터인데, 이 역시 실제와 비슷한 것으로 내비게이터는 주지사나 미국 지방 고위관료들이 즐겨 타는 차종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내비게이터는 1998년에 처음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어, 2001년에는 미국 고급 SUV 시장의 40%를 차지했을 정도였다. 차체 길이가 5.6미터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며, V8 5.4리터 엔진을 얹어 엔진회전수 5000rpm에서 최고출력 300마력을 낸다. 대배기량의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가 어우러져 엄청난 차체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전체적인 주행감은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미국 대형세단을 높은 좌석위치에서 모는 느낌이다. 실내는 GM의 캐딜락과 함께 미국의 양대 고급차 브랜드인 링컨의 명성에 맞도록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가죽, 나무무늬장식, 고급 카펫 등으로 마감돼 있으며 전동조절이 가능한 좌석, 후방주차센서 등 각종 편의장치는 기본이다. 특히 대용량 앰프와 초대형 스피커를 장착하는 오디오 개조도 성행하는데, 실제로 LA 시내에서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랩음악을 울리며 다니는 내비게이터를 쉽게 볼 수 있다.
내비게이터의 아랫급 모델로 V8 4.6리터 엔진에 304마력을 내는 링컨 에비에이터를 국내에서 몰아본 적이 있었는데, 내비게이터에 비해 차체가 작은데도 한국인이 몰기에는 너무 큰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주행감 역시 전체적으로 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나아가는 미국차 특유의 느낌 그대로였는데, 에비에이터보다 덩치가 더 큰 내비게이터의 주행감은 이보다 더 여유로울 것으로 짐작된다. 미국에서 내비게이터의 가격은 5만달러 내외로 살 수 있지만, 미국 내에서 성공한 사람이 타는 SUV라는 인식이 어느정도 형성 돼 있을만큼 꽤 고급스러운 차에 속한다. 가격적으로 보면 벤츠 M클래스, BMW X5, 폴크스바겐 투아렉 같은 차종이나 렉서스 인피니티의 대형 SUV와 비교대상이지만, 크기로 보면 역시 내비게이터 쪽이 한수 위다. 덩치로 보면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나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같은 차와 경쟁한다.
영화에서 내비게이터는 LA의 인종적 계층적 갈등을 보여주는 효과적 소품으로 등장하지만, 내비게이터가 앞으로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환경친화적 자동차행정을 중요시하는 캘리포니아 주정부 방침이나 점점 에너지 절약형 차를 찾는 미국인들의 취향으로 볼 때, 내비게이터처럼 기름을 하마처럼 먹어대는 대형 SUV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내비게이터는 작년말에 전년보다 판매가 절반 이상 줄어 포드그룹 전체의 미국내 판매부진에 악영향을 끼쳤다. 과거 주정부 고위관리들도 내비게이터 같은 차를 관용차로 즐겨 사용했으나, 최근엔 기름을 덜 먹는 중형 세단이나 중소형 SUV로 바꾸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크래쉬’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기막힌 각본 솜씨를 보여준 캐나다 출신의 영화작가 폴 해기스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동떨어져 보이는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고, 영상이나 편집 스타일을 음미해보기에도 상영시간이 짧다. 샌드라 불럭, 맷 딜런, 라이언 필립, 브랜든 프레이저, 탠디 뉴튼 같은 호화배역들이 마치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처럼 다양하게 등장하는 모습도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