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 영화중에 참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였는데요.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입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한점 부끄럼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의 햇살' 쯤 되지 않을까요? 이보다 더 눈물 나는 제목이 있을까 싶습니다. 누구나 기억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이 있을겁니다. 괴로왔던 기억, 황당했던 기억, 부끄러웠던 기억, 너무 사랑해서 잊고 싶은 사람, 생각 하기도 끔찍한 사람... 영화는 그런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 한번쯤 안해본 사람은 없을겁니다.
'청연'이라는 영화에서도 '이터널 선샤인'과 비슷한 구석이 눈에 보이더군요.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인생역정을 그린 영화인데요. 상영 전부터 친일인사를 미화했다는 등 말이 많았던 영화였는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박경원이 모든 괴로움을 잊고 창공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장면에서 그냥 눈물이 났습니다. 그녀가 세상의 모든 편견을 이겨내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동차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현실세계의 무게를 잊기 위한 방편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물론 그게 다는 아니겠지요) 왜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현실은 척박하고 삭막하고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또 오해와 편견, 갈등과 반목이 분명 존재합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들이 기억을 지워주는 병원을 찾아가는 것도, '청연'에서 박경원이 비행기에 빠지는 것도, 모두 현실세계의 무거움을 온전히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새해 첫날부터 너무 무거운 얘기를 늘어놓은 것 같네요. 200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한해도 자동차세상에서 여러 좋은 분들과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 많이 나눌 수 있었던게 가장 보람있었던 일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이곳을 찾아주시는 모든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올 한해도 항상 건강하시고 행운이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특히 게시판에 소중하고 유익한 글 올려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글을 읽을 때마다 제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과 앞으로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앞으로도 '자동차세상'이 자동차 정보공유의 좋은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짧고 간단한 것도 좋고, 개인적인 사진도 좋고, 꼭 자동차 얘기만이 아니어도 좋으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음은 대우자동차 사보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터널 선샤인’의 도요타 카롤라
흥행영화를 보다보면 여기에 어떤 공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전엔 할리우드 영화만의 일이라 생각했지만 최근 한국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톱스타를 전면에 세우고 우스꽝스러운 대사나 설정을 만들거나 눈물을 끌어내는 감동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웬지 상업적인 속내를 숨기고 그럴듯하게 포장만 한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할 때가 있다. 이런게 나쁘다는건 아니지만, 비슷한 상황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를 다른 영화에서 반복해서 보다보면 아무래도 새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게 된다. 보고 나서도 뭔가 허전하다. 영화보는 동안 걱정을 잊고 즐길 수 있는 영화도 필요하지만 좀더 진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멋진 영화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진다.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은 그럴 때 볼만한 영화 중에서는 최근에 본 것 가운데 가장 좋았다. 연말연시 사랑스러운 연인과 근사한 저녁을 먹은 뒤 즐길만한 영화는 아니다. 또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난 뒤 단체 영화관람에 나설 때에도 그리 적합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 당신 마음 한구석이 뭔가 허전하게 비어있다면, 겨울 저녁 찬 바람이 스산하고 퇴근은 했는데 딱히 술 한잔할 친구는 보이지 않고 조용히 영화를 음미해보고 싶을 때라면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매일같이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남자 조엘(짐 캐리)은 어느날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회사에 가지 않고 몬톡이라는 곳의 겨울 바다를 보러 간다. 그곳에서 자유분방하지만 매력적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을 만나고, 둘은 곧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을 묶어두고 싶어하는 조엘과 달리 그런 구속을 못견뎌하는 클레멘타인.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되고 둘은 결별을 선언한다. 조엘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어하지만 어느날 클레멘타인이 일하는 서점을 찾아가보니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채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었다. 상심한 그는 아픈 기억만 지워준다는 라쿠나병원을 찾아가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영화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러나 주인공의 성격과 상태를 잘 반영하는 자동차 소품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조엘이 운전하는 차 도요타 카롤라다. 영화가 2004년작이긴 하지만, 최신 모델은 아니고 90년대 후반 연식으로 보이는, 현행 모델 바로 이전의 모델이다.
북미시장에서 도요타 카롤라나 혼다 시빅은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롭지못한 대학생들이나 젊은 회사원들이 많이 타는 차다. 대학 캠퍼스에서 많이 보이는 시빅이 조금은 발랄한 이미지라면, 카롤라는 약간 개성없고 평범무던한 느낌이다. 우리로 치면 현대 아반떼XD 정도의 크기인데, 차를 봤을 때 아무도 그 차의 특징을 기억하지 못할만큼 지극히 평범한 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는 주인공 조엘의 뭐하나 특별할게 없는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의 고통을 대변한다. 1세대 모델이 데뷔한지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카롤라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지금도 일본내 판매 1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카롤라의 총 생산대수는 3000만대를 넘는다. 차종의 연속성이 약간 떨어지기 때문에 폭스바겐 골프와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어쨌든 골프의 2500만대를 넘어서는 놀라운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차는 1995년 첫 등장한 8세대 모델이다. 개성있거나 관심 끌만한 외형은 아니나 고장 적고 잘 달리고 기름 덜 먹는 일상용차로는 최고다. 국내에서라면 아반떼XD급인 카롤라에 전동유리창이나 오토 도어록 같은 것은 물론이고, 전동접이식 미러와 전동시트 같은 온갖 편의장치를 달아놓았을텐데, 북미에서 이 급의 차에 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실용성 뛰어나고 중고차 가격 높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카롤라는 이런 북미 소비자들의 요구에 가장 충실한 차중 하나인 셈인데, 실제로 조엘이 모는 카롤라의 경우 옆에 누가 와서 운전석 쪽 유리창을 여는 장면을 보면 수동으로 핸들을 돌려 유리를 내린다. 국내 대부분의 소형차는 앞뒤 유리창 모두 전동식이다. 사실 국내 차량들의 편의사양인 과잉인 것인데도 앞 유리창을 돌려서 여는 영화 속 차가 이상하게 보인다.
‘이터널 선샤인’은 자신의 기억 중에서 괴로왔던 사랑의 부분을 지울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발상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아픔과 상처만으로 남아있는 사랑도 인생의 한 부분이며 지워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추억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또 사랑은 물리적 기억을 지우더라도 가슴에 남아있다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할리우드의 재담꾼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쓰고, 톱 스타들의 뮤직비디오로 이름을 날린 미셸 공드리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코미디 배우 짐 캐리의 기막힌 내면연기 변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데, 케이트 윈슬렛, 커스틴 던스트, 일라이자 우드 등 할리우드의 젊은 스타들의 연기력 대결을 보는 것은 즐거운 덤이다.
감독 미셸 공드리는 프랑스 국립예술학교를 나와 가수 비욕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롤링 스톤즈, 라디오 헤드, 레니 크라비츠, 셰릴 크로우 등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고, 코카콜라 나이키 리바이스 등의 광고를 찍으며 깐느와 클리오에서 최고상을 받기도 했다. 2001년 첫 데뷔영화인 ‘휴먼 네이처’를 찰리 카우프만과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1999년 ‘존 말코비치 되기’로 이름을 알린 작가 찰리 카우프만은 ‘휴먼 네이처’ ‘어댑테이션’ ‘컨페션’ 등 손을 댄 작품마다 기발한 상상력과 흥미로운 얘기로 주목 받았다. ‘이터널 선샤인’으로 77회 아카데미에서 미셸 공드리와 각본상을 공동수상했다.
조엘 역의 짐 캐리는 ‘덤 앤 더머’ ‘에이스 벤츄라’ ‘마스크’ 등에서 보여준 특유의 표정연기를 넘어 ‘트루먼쇼’ ‘부르스 올마이티’ 등의 내면연기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 내면 연기는 이번 이터널 선샤인에서 무르익은 느낌이다. 클레멘타인 역의 케이트 윈슬렛은 1997년 ‘타이타닉’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상대역으로 이름을 각인시켰지만, 이번 영화에서 문제 많지만 순수한 연인 역으로 호연한다. 메리 역의 커스틴 던스트는 ‘스파이더’에서 토비 맥과이어의 상대역으로 나왔고, ‘윔블던’에서 스타 테니스 선수 리지역을 맡았다. 대단히 예쁜 얼굴이라 하긴 힘들지만, 볼수록 매력이 묻어나는 캐릭터다. 조엘에 관한 기억을 지워버린 클레멘타인의 못된 새 연인 패트릭 역의 일라이자 우드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프로도로 유명하다. 하워드 박사 역의 톰 윌킨슨은 ‘풀 몬티’에서 노동자 출신의 스트리퍼로 나왔고, ‘이프 온리’에서 주인공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는 택시기사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