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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사건 개요
★★들어가기전에 꼭! 알아야 할 사실★★
5.18 당시 정권은 최규하대통령 정권이었으며,
김대중은 '임시내각명단'까지 작성한후, 최규하대통령이 당장 퇴진하지 않으면
22일 내란을 일으키겠다고 선포함
김대중이 최규하대통령 퇴진을 요구한 이유는 당시 최규하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할려고 했기때문임
(직선제개헌하면 김대중 자신이 대통령을 할 가망성이 없었기 때문에 최규하 퇴진요구)
이에 전두환은 내란혐의로 김대중을 체포함
(이에 광주에서는 '김대중 석방하라'며 폭동 일어난 이게 광주폭동)
즉, 당시 정권은 최규하대통령 정권이었고
김대중이 퇴진 요구 및 불응시 '내란선포'하겠다는 대상도 최규하대통령이었음
(이는 명확한 팩트!)
- 당시상황
-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유신헌법의 간접선거 절차에 따라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 대통령은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연 내에(80년) 완료하고 80년 말경 직선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81년 초에 정권을 이양한다는 정치일정을 제시.
- 80년 봄이 되자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을 주축으로 하는 야당 및 민주화 단체 등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야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는 각종 집회를 열었고, 대학생들은 이를 지지하며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 및 집회를 전국적으로 전개(80년 서울의 봄).
- 직전 4월 말에는 사북탄광에서 폭력적 노사분규가 일어나 경찰관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하였으며 사북 일대가 치안공백 상태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
- 5월 15일 운동권 대학생이 주도하여 10만여명이 운집한 서울역 시위에서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경찰 수명이 숨지는 등 극심한 사회혼란 및 안보불안 상태에 놓임.
- 김대중 등 재야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하여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것을 선언하고 대학생 등을 동원하여 봉기계획을 추진.
- 이에 정부는 5월17일 자정을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김대중 및 그 측근 등을 내란 혐의로, 김종필 이후락 등을 부정축재 등의 혐의로 체포하고, 김영삼을 가택 연금함.
-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모든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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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발생
- 5.17일 0시를 기하여 발표된 계엄 포고령에 의하여 조선대 전남대 등 광주시내 대학가에 계엄군 진주(교내의 학생들을 강제로 추방시킴).
- 5. 18일 오전 등교하던 전남대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
* 오전 10시경 시내 중심가로 이동한 2백여 명의 전남대생이 시위, 오후 2시경에는 1천여명으로 늘어나 경찰과 투석전 등 격렬한 시위로 경찰이 밀리자, 오후 5시 40분경 계엄군 병력을 투입, 상호 격렬한 충돌 및 부상자 다수 발생.
*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 계엄군에 살해되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 유포 => 전 광주시대로 확산
- 5.19일 시위가 확산되어 파출소 방화, 차량 방화 등의 사태 발생.
* 시위대 나주 예비군 대대 무기고 등을 습격, 소총과 탄약 탈취하여 무장.
* 광주 시외 버스터미널 근처의 시위대 중에 총상으로 의심되는 사망자 1명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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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0일 1만명의 시위대가 광주 MBC방송국 점거 방화/시청습격 파괴/ 도청앞 저지 경찰관 4명이 시위대가 돌진하는 차량에 치어 사망 / 시내 파출소 다수 방화
* 광주시내의 거의 모든 경찰서와 파출소를 시위대가 습격 점거.
- 5.21일 광주세무서 방화로 전소/ CBS 방송국 점거 방화 및 차량 탈취.
* 시민군이 오전에 아시아자동차를 습격, 장갑차 및 군용 차량 등 2백여대를 탈취.
* 12시경 도청경비 계엄군과 수만명의 시민군 대치하던 중, 시위대의 차량 돌진으로 계엄군이 깔려 수명의 사상자 발생.
그 와중에 돌격하는 시민군의 장갑차,버스를 향해 우발적인 발포-(11공수여단 63대대장 안부웅 중령등의 증언 등)
(그 이전에 시민군 혹은 계엄군이 먼저 발포했다는 주장과 증언들도 있음)
* 시민군이 5차에 걸쳐 2천7백 여명의 죄수가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습격. 상당수의 사상자 발생.
* 계엄군 외곽지대로 완전 철수 => 시민군측이 광주시내를 장악, 계엄군 광주 외곽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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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3일 시민군측 지역유지 및 종교계 인사 등으로 수습위원회를 구성, 무기 회수와 당국과의 협의를 통한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 => 강경파의 타협 반대로 수습 실패.
- 5.24이후 강경파와 온건파의 의견 대립과 혼란 속에 광주 시내는 시민군이 장악하고 계엄군은 광주 외곽 봉쇄.
* 대부분의 시민들은 귀가하고 강경파 시민군 200여명 정도가 전남도청 및 인근에 잔류.
- 5.27일 새벽에 시민군의 최종 집결지인 전남도청에 계엄군이 진입하여 장악 => 시민군 완전 해산.
* 광주폭동사태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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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김대중이 직선제를 하면 본인이 대통령이 되기에 불리하니,
최규하정권 퇴진 불응시 내란선포경고를 한것이고,
그후 무기고와 총기,장갑차등을 턴 순간부터 광주는 민주화운동이 아닌 폭동이었음.
'한 국가'에서 군대가 '국군'과 '시민군' 2개로 나누어질수는 없음.
그러므로 시민군이란 용어 자체가 사실상 반란군 내지 폭동이라 볼수 있음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민주화는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총기를 들고 폭동을 일으킨 광주사태가 아닌
직선제 개헌을 실현시킨 87년' 6월 민주항쟁' 이라고 봐야 한다.
즉, 87년 6월항쟁과 달리 광주사태는 이땅에서 민주화에 기여한것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폭동이후의 갈등과 이권분열, 5.18 이전에 볼수 없었던 '종북좌익들의 눈부신 번창'만을 남겼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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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때중이는 기회만 보고 있다가 땅크성님이 잠시 한눈판사이 여자치마를 몰래 걷어 올림 그리고 딴청부리면서 다른 곳 처다 봄.
근데 그 여자가 바로 뒤에 서 있던 땅크성님이 치마를 올린 줄 알고 빰을 때림.
땅크성님이 뭔 죄당가 ㅜㅜ
샘물교회 박은조 같은넘
자기자식은 안죽이고 국회의원까지 시키고
남에 자식들만 전부 사선으로 내몬 새기
결국 죄받아서 그 아새기 최근엔 주뎅이가~~~~헤~~~~ 벌``레~~~ 하고 병신됏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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