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포니 1 사진을 보니 옛날 일이 생각나네요.
포니와 개고기
1. 1970년 대 후반~80년대 초반 내가 대구 초등학교 고학년 및 중앙중학교를 다닐 때 아버님은 대구의 포니 1 승용차 운전기사였다. 중?고등학교(중앙중학교, 중앙상업고등학교)가 같이 있는 학교의 교장, 교감 선생님 출장용 및 학교 공무로 멀리 갈 때 사용하는 용도였다.
당시에는 승용차 자체가 귀하던 시절이었고, 포니 1도 기사를 두고 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이 중?고등학교 합하여 100명 가까이 되어도 차가 있는 분은 1명 있을까 말까 할 시절이었다.
공용 차량이었으므로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사용되지 않고 학교에 세워두었다.
2. 아버님이 학교에 약 3년 정도 근무하였는데 내 기억으로는 1번 정도 여름철에 차를 몰고 대구에서 마산까지해수욕을 갔다. 아버님이 3년 동안 1번 정도만 차를 몰고 해수욕장에 간 것으로 볼 때 아마 학교에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이 차를 이용하였을 것인데 아버지와 같이 우리 가족이 포니를 타고 나들이 간 것은 내 기억으로 한번 정도 뿐 인 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강직한 분이라기보다는 교장 선생님 몰래 차를 몰고 나갔다가 들통이 나거나 사고라도 난다면 곧바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짐작된다.
하여튼 1970.년대 후반 자가용 차를 몰고 해수욕을 간다는 것은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롤스로이스를 몰고 피서를 가는 정도 또는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어린 마음에도 정말로 폼이 났다.
3. 가끔씩 선생님들이 주말에 차가 필요한 경우 아버님에게 어렵게 부탁을 하면 아버님은 교장선생님이나 서무과장 몰래 선생님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하였다. 사고가 나면 모든 책임과 수리비 등이 아버님에게 돌아갈 수 있고 퇴직을 각오하여야 하므로 한번 편의를 봐주는 것이어려웠지만 그래도 나중에 문제가 된다면 선생님들도 같이 책임을 지거나 아버님을 변호하여 줄 것이므로 1달에 1번 이상은 운행된 것 같다. 또한 넉넉하지 않은 기사 월급에 다소간의 용돈 벌이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침작된다. 그래도 아버님도 정말로 조심스러운 결정을 하고 선생님들의 편의를 봐주신 거였다. 이러한 사정을 선생님들도 충분히 알았으므로 정말로 조심스럽게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나도 아버님이 근무하는 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아버님 덕분에 선생님들에게 많은 혜택과 귀여움을 받았고, 그 이면에는 아버님이 선생님들을 위하여 차를 운행하여 준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주로 가을이 되면 선생님들 고향의 쌀 기타 농산품을 실어오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시골에 선생님들의 부모님이나 땅이 있어 추수 후에 쌀 기타 농산품을 실어오는 것이다. 아버님이 일요일에 선생님과 같이 가셨다가 돌아오면 쌀, 콩, 고구마, 호박, 밤, 땅콩 등을 가지고 오면 형, 동생, 나는 맛있게 먹었다.
4. 우리는 중학교 안에 낡은 사택에서 생활하였다. 그래서 아침 8시 쯤에 학교 교실에 가방을 가져다 놓고 친구들과 선생님의 눈도장을 찍고 다시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거나 또는 방에서 누워 있다가 8시 50분 쯤 다시 교실에 갔다. 정말로 환상적인 생활이었다. 학교 생활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학교 통학 스트레스는 하나도 없었다.
5. 사택 옆에는 중앙중학교 유도부 기숙사가 있었다. 말이 기숙사지 옛날식 낡은 기와 건물에 4평 정도 되는 방에 중학생 유도부원들 5~6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유도 선생님은 한상봉 선생님으로 제자들 중 나중에 황정오, 안병근, 김재엽, 이경근 등 올림픽 금메달, 은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중?고등학교 유도 지도자를 기준으로 한명의 지도자 밑에서 이렇게 많은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나온 사례가 없었으므로 나중에 선생님을 뵈오니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현재 유도 8단인데 유도협회 파벌싸움으로 9단으로 승단하지 못하여 많이 억울해 하였다(88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재엽도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걷고 있다).
6. 학교 사택에 있을 때 그 시절에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의 기준으로는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 이하 반려견을 사랑하는 분들은 절대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
0. 당시에는 우리 국민들 중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고, 내놓고 개고기를 팔고 보신탕 집이 많이 있던 시절이었다.
0. 그 시설 동네에는 개가 많았고 개를 묶어 놓지 않고 키우던 집도 많았다. 그래서 가끔 동네 개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학교에 노무일을 하던 분들(보통 우리들은 그 시절 그분들을 소사, 주사, 아저씨로 불렀다)이 낮이 철 모르는 개들이 학교 마당으로 들어오면 살살 꼬셔서 가까이 오게 한 후 잡아서 줄로 목줄을 하여 학교 뒷 편의 후미진 곳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어느 곳에서 그 개를 잡아서 보신탕 및 수육을 해서 먹었다. 나는 그것을 한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목격이 아니고 개잡는 소리를 들었다.
0. 어느 날 밤 내 방 안에 있는데 아저씨들이 개를 잡는다면서 학교 안 사택에 있은 우리 집에 오셨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너무 겁이 나서 절대 방문을 열지 않았지만 한옥의 미닫이 문은 창호지로 되어 있어 바깥 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들렀다.
0. 듣고 싶지 않아도 귀가 자동으로 쫑긋하게 되는데 아저씨들이 개에 목줄을 걸어 우리 집 대문 문기둥에 매달아 놓았고 생생하게 개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목이 졸린 개가 아직 죽지않은 상태였고, 아저씨들이 몽둥이로 개를 때렸다. 몽둥이로 개를 때릴 때마다 아직 숨이 남아 있는 개가 아주 짧은 단발음의 신음 소리를 내면서 움찔하면서 위로 솟구쳤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고(물론 지상에서 약 1.5미터 정도 높이에 매달린 상태이다) 그럴 때마다 개의 목줄이 다시 개의 숨통을 더 조이게 되었고 줄에 매달려 아래로 떨어진 개는 아주 낮은 소리로 ‘크윽 ~~’ 하면서 들릴 듯 말듯한 소리를 3~4초간 내었고, 그 소리는 정말로 지옥에서 들리는 소리인 듯 하였다. 소리가 끊어지면 아저씨들은 다시 몽둥이로 개를 때리고 그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0. 창호지 문 밖의 상황이어서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누가 비디오로 촬영하여 내 머리통을 쥐고 눈을 강제로 뜨게하여 보여주는 듯이 내 머릿속에 그 상황이 너무나 선명하게 자동적으로 보여지는 것 같아서 정말로 미칠 것만 같았다. 4~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직접 눈으로 본 것 이상으로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당시 내 방에서 소리만 듣고 오만가지 상상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0. 하여튼 그 상황이 끝나고 나서 아저씨들이 돌아가고 집안은 일순간 고요해졌고, 나도 곧바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0. 그때부터 약 1시간 남짓 지났을까 다시 왁짜지껄한 아저씨들 소리가 들렸고, 아버님인지 아니면 아저씨들 중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너도 고기 한번 먹어봐라’라고 하면서 개고기가 담긴 접시와 젓가락을 가져다 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소고기, 돼지고기도 가끔 보았는데 개고기는 처음 보았다. 당시 내 눈에는 소고기, 돼지고기에 비하여 물기를 많아 머금고 있어 매우 촉촉하게 보였고 너무 부드럽게 보였다.
0. 방금 전 우리 집 대문에 매달려 처절하게 나지막한 소리로 ‘크윽 ~~~~’ 하면서 신음소리를 내던 개가 촉촉한 고기가 되어 접시에 담겨 내 앞에 놓여 있어 고기를 먹으면 뭔가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어 적지 않은 고민이 되었다. 당시 고기가 귀하던 시절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어른들이 ‘마이(’많이‘의 경상도식 사투리) 무라, 맛있다. 귀한거다’라고 하여 침이 꼴깍 넘어갔다. .......
0. 다음날 저녁 다시 아저씨들이 우리 집에 왔다. 그 이유는 어제 잡은 개고기 껍데기를 대구 칠성시장에 가서 불에 구워 온 것이다(오늘날 돼지껍데기 요리와 비슷하리라고 본다). 아저씨들이 가져온 개 껍데기는 눈으로 보기에 쫀득쫀득하고 맛있게 보였지만 나는 왠지 찝찝하여 먹지 않았다.
0. 그 후로는 한번도 우리 집에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아저씨들이 개고기를 끊은 것은 아닐테고 학교의 더 후미진 어느 곳에서 같은 일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7.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돌아가신 아버님이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따로 계시는 어머님에게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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