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조 페라리가 태어나 살고 있던 이태리 중부의 도시 모데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레나쪼 디 센토에서 1916년에 태어난 페루쵸 람보르기니도 페라리에 미친 사람이었는데, 그는 2차대전이 끝나자 쓸모 없어진 군용차를 인수해 농업용 트랙터로 개조하여 판매, 이태리의 ‘트랙터왕’이 될 만큼 성공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피아트를 손질해 자동차경주에 참가할 만큼 스피드광이었다.
1950년 후반 트랙터사업으로 부자가 된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를 구입해 경주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성격이 아주 급해서 페라리를 혹사하다가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그래서 엔조 페라리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 항의를 했으나 “네가 페라리차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 트랙터나 타라!”고 냉대를 당하자 그만 화가 났다.
열받은 람보르기니는 “그렇다면 내가 페라리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성능을 가진 차를 만드마!”하고 결심했다.
람보르기니 그도 군용차를 트랙터로 개조해본 경험과 시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 제조업을 하는 데는 그리 힘이 들지 않았다.
문제는 성능을 어떻게 해야 페라리를 능가하는 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1963년 람보르기니가 새운 자동차회사는 최초로 V12 3,500cc 360마력 엔진을 사용한 람보르기니 350GTV를 발매했다.
이 차는 최고시속 280km/h까지 냈고 당시 인기 스포츠카였던 페라리 250GT 로소보다도 성능이 앞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람보르기니가 만드는 차에는 페라리의 ‘도약하는 말’을 상징하는 엠블럼에 대항해 ‘성난 황소’가 장착되었다.
3년 뒤에는 지금도 최고의 수퍼카로 인정받는 ‘미우라’를 만들었다.
미우라는 V12 4,000cc 350마력(1966년)과 385마력(1973년) 엔진을 사용한 차로 이태리의 베르토네가 디자인했다.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미우라는 엄청난 성능을 내었고 당시 시속 295km/h라는 세계기록까지 세웠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모두 760대가 만들어졌고 돈 많은 스포츠카 광들에게는 그야말로 ‘드림카’로 알려졌다.
오늘날 몇 대 안 남은 이 차는 소중하고도 값비싼 ‘콜렉터즈 카’다.
미우라 한대는 베르토네의 본사에 보존되어있다.
람보르기니는 로드스터 형식의 차를 계속 만들었다.
1968년에는 이슬레로, 1970년에는 자마라와 우라코 등을 등장시켰고 1974년에 전설의 차, ‘쿤타치’를 발매했다.
지금도 쿤타치는 명실공히 수퍼카다.
쿤타치는 미우라의 야성미를 더욱 직선적으로 다듬어 당시의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모습을 한 차였다.
엔진과 골격은 지오토 비자리니가 설계했고 차체 디자인은 미우라와 마찬가지로 베르토네의 마르첼로 간디니가 맡았다.
1970년 12월 처음 모델이 베르토네 스튜디오에서 직원만을 상대로 공개되었을 때, 너무나도 전위적인 모습에 놀라 직원 한 명이 “쿤타치!(Countach!)”라고 소리쳤다.
이 말은 이태리 토리노지방의 사투리로 ‘감염’ 또는 ‘전염’이라는 뜻인데, 곧 그 말이 채택되었다.
초기에 제작된 LP112는 1971년 4월 11일 제네바 모터쇼에서 ‘LP500 Countach’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었고 이것이 바로 전설의 수퍼카 쿤타치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V12 4,971cc 420마력 엔진을 사용한 쿤타치의 데뷔는 온 세계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최고시속 300km/h 등으로 페라리를 능가하는 고성능 모델의 등장에 모두가 환성을 질렀다.
결국 화가 난 람보르기니가 페라리를 이겼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그러나 양산에 들어가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어 1974년에야 고객들에게 판매되었고 이 차는 ‘LP400’이란 이름으로 1977년까지 149대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쿤타치의 제1세대다.
이 무렵 페루쵸 람보르기니의 과격한 성격 탓인지 경영이 악화되어 경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쿤타치의 생산은 계속되어 2세대 쿤타치가 ‘LP400S’란 이름으로 발매되었다.
외관도 크게 달라졌고 서스펜션, 휠, 타이어 등도 바뀌었다.
이 모델은 1978년부터 1982년까지 237대가 만들어졌다.
이어서 4,757cc로 배기량을 늘린 375마력 엔진을 사용한 3세대 쿤타치가 ‘LP500’란 이름으로 개발되었다.
3세대 쿤타치는 보쉬 KE 제트로닉 연료분사방식을 채택한 것이 특징이었고 1982년부터 1985년까지 321대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경영난은 더욱 심해졌고 람보르기니는 1987년 미국의 크라이슬러 산하로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페루쵸는 이후로 시골에 낙향해 와인메이커가 되었다.
1988년 9월 8일, 람보르기니 창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애니버서리 쿤타치 5000S’가 400대 한정생산된다는 발표가 나왔고 너무나 많은 애호가들의 간청에 못 이겨 결국은 1989년까지 730대가 만들어졌다.
애니버서리 카운타크 5000S에 사용한 엔진은 V12 5,167cc 455마력이고 최고시속도 300km/h를 넘었다.
이것으로 카운타크 시대는 끝났다.
이어서 1990년에 카운타크의 후속차로 등장한 차가 ‘디아블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