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년 모월 모시
그당시 현역1급 갑종 통지에 따라
여수 남국민학교에 소집됩니다
(서울 토박이지만 빨리 다녀오기위해 지원을 하였습니다 당시 입영영장을 받고 1년뒤 입대였습니다 )
열차로 여수 남국민학교 까지 갑니다
이런 저런 절차를 거쳐 또다시 동기생들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열차를 탑니다
서울역을 지나는데 미치는줄 알았습니다
열차는 달리고 달려 춘천역에 안개가 자욱한 춘천역에 도착 합니다
서울에서 가장 멀리간곳이 가평정도?
그랬었죠 한마디로 서울촌놈 나중에 군대서 촌놈소릴 들으며 많이도 맞았더랬죠
다들 아시다시피 군대는 작업이 70%죠
낫질 못한다 삽질 못한다 등등
아무튼 도착과 동시에 그넓은(?)춘천역 광장에 빼곡히 군용트럭 소위 60트럭들이 꽉차있었죠
그때의 불안감이 지금도 느겨지네요
군복을 입은 어마무시한 군인들이 절도있게 쌍욕을 해가며 60트럭에 질서정연하게 태웁니다
사실 공포감을 느낄정도로 겁이 났었죠
얼만인지는 모르지만 드넓은 연병장에 동작이 늦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으며 하차하게 되죠 60트럭이 그렇게 높은줄은 몰랐습니다 내리다가 발목이 부러진 동기도 있었으니까요 103보..
그렇게 103보 에 도착하여 내무반이라 생소한곳에 뿌려지다 시피 합니다
모두가 다그렇게 느끼진 않았겠지만
제 느낌은 사람이 아닌 가축정도의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
그것도 지나고 생각납니다 그당시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오로지 잘못해서 두들겨 맞지만 않으려 온 촉각을 곤두세웠죠
한숨도 못자고 뒤척이는데 조교의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립니다 '기상'!!!!!!!!
일이 생겨서 조금있다가 이어서 쓰겠습니디 죄송 - - ;;;
조교의 파열음과 함께 모포를 접으며 복명복창 하죠
잠결에 모포를 접으며 복명복창하는데 누군가 따라하지 않았나 봅니다 날카로운 따귀와 함께 발길이질이 이어지고 사제물을 빼야 한다고 알수없는 소리를 지르며 구타를 합니다 맞는 당사자는 '죄송합니다' 라고 외치지만 '죄송합니다? 는 사제용어 랍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라고 군대용어를 안썻다는거죠'그 이유로 더 맞게되죠 나중에 알게됐지만 사제생활에 물든 인간들 혼을 빼야 한다는 룰이 있다는걸 알게된건 한참뒤일입니다
하..
103보의 3일 군복을 지급 받고 군번을 지급 받고 사복을 소포붙이면서도 눈물 가족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을정도로 단 10분도 놔두질 않았죠
2박3일 예방주사등 일련의 공포스런 날들이 지나가며 장병들 사이에 소문이 납니다 우리를 데려갈 차가 오는데 60트럭이 오면 좋은곳 관광버스가 오면 힘든곳 이런 말들이 오가며 내줄앞에 선것은 관광버스였죠 ㅠ
아무튼 무조건 생각할 사이도없이 밀려 탑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려한 경관이 스쳐지나가는데 그런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무섭고 두렵기만 했었죠
산길을 두시간 이상을 달려 민간인 통제선 이란 푯말을거쳐 한참을 더가 ㅇㅇ신병교육대 라는 곳에 도착을 합니다
아까글에 언급을 못했지만 보충대서 군복을 지급 받기전 사복차림으로 국기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굴리고 굴려 옷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그걸 그대로 소포로 보넸었죠 이해가 안되는 부분 입니다
신병교육
도착시에는 몸에 맞지도 안는 군복과군화를 신었지만 군인이라는
생각과 푸른제복을 입었다는 자부심도 약간의 자부심도 있었죠
중간 빼치카를 중심으로 1소대 2소대 3소다 4화기소대로 한 내무반에서 ...
그렇게 훈련소생활이 시작됩니다
일자형 내무반..
백명이 넘는 한내무반의 생활..
일자형 내무반 하나가 한중대였죠
6주간의 훈련소 생활의 시작이었드렜죠
하...신기하네요 글을 쓰면서도
기억을 더듬어 쓰는데
제 스스로도 이런곳서 어떻게 생활했지? 이런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군대는 다 그렇고 똑같다고 생각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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