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
2012년 스보보드니 철도대학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8일 현재 러시아 아무르주의 스보보드니(Svobodny)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스보보드니는 원래 알렉세예프스크 였으나, 레닌의 적군(赤軍 : 붉은 군대)에 의해 스보보드니 즉, 자유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는 이만이라고 부른다. 러시아 붉은 군대가 한인 무장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다른 말로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목차
한인 무장 독립군의 구성[편집]
민족주의 계열[편집]
주로 서간도와 북간도 지방의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 독립군을 지칭한다. 사상과 종교(대종교, 천도교,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다양했지만 민족의 해방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이들이었다. 비교적 단결이 잘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편집]
러시아에서 레닌이 사회주의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켰다. 레닌 사회주의는 공동 생산, 공동 분배가 되는 체제를 지향했기에 공산주의라고도 부른다. 러시아 혁명을 이룩한 레닌의 공산당이 볼셰비키이고, 레닌주의 국제 공산당 연합이 코민테른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한인들이 공산당 조직을 결성한다. 크게 두 개의 파로 나뉘어져 경쟁했다.
고려공산당(상하이파)[편집]
1895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Khabarovsk)의 동부 시베리아 총독 관저
1919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李東輝)·박애(朴愛)·전일(全一)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만들었다. 볼셰비키의 원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토체코프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한인 공산주의 단체 중에서 유일하게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은 조직이 되었다. 정통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민족 해방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하는 편의적 공산주의 였기에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상하의 임시정부와 노선차이로 떨어져 나와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했다. 그래서 상하이파라고 불렸다.[1] 대표적인 무장 부대는 이항부대와 다반군대이다.
- 박일리아의 이항부대 : 니콜라옙스크항을 근거지로 해서 붙은 이름.
- 최니콜라이의 다반군대 : 하바롭스크 한인 마을인 다반에서 구성되어 따온 이름.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편집]
1918년의 이르쿠츠크(Irkutsk)] 시가지 모습
1919년 9월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金哲勳)·오하묵(吳夏默) 등이 중심이 되어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을 만들었다. 스미야스키(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Шумяцкий)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볼셰비키의 한인지부가 되었다. 그리고 볼계비키 시베리아국 동방민족부 산하 고려부에서 한인 사회주의 운동을 총괄하게 되면서 이르쿠츠크가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1년 5월 이들도 상하이파와 똑같이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하였다. 그래서 이르쿠츠크파로 불렸다. [2] 대표적인 무장 부대는 자유대대이다.
- 오하묵의 자유대대 : 한인 빨치산 부대가 극동공화국 소속 특립한인보병대대가 되었다. 오하묵이 대장이었고 주둔지가 자유시였기에 자유대대라고 불렀다.
갈등[편집]
볼셰비키는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중 누구의 손도 확실하게 들어주지 않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랬기에 고려공산당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서로 대립하면서 코민테른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경쟁했다.[3]
전개[편집]
민족주의 계열의 상황[편집]
2014년 중국 흑룡강성의 미산(密山)
1920년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이후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했지만 성과가 없자 민간인과 군인을 구별하지 않고 한국인 수만 명을 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이로써 서간도, 북간도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의 간도 한인무장부대들이 큰 피해을 입었다. 이후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북쪽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 지역인 흑룡강성 흑룡강성 미산시(密山市)에 모였다.
이곳에 모인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다.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1919년 만주 북간도에서 조직. 대한독립군단의 주도 조직. 대종교 계열.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 1919년 만주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서 조직. 사령관 홍범도(洪範圖).
-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 :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 기독교 감리교 계열. 단장 김규면(金圭冕).
-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 1919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조직. 개신교 계열. 구춘선(具春先).
- 혼춘대한국민회(琿春大韓國民會) : 1919년 만주 혼춘에서 조직. 회장 이명순(李明淳).
-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1919년 만주 왕청현(汪淸縣) 봉의동(鳳義洞)에서 조직. 사령관 최진동(崔振東).
- 의군부(義軍府) : 1919년 만주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조직. 총재 이범윤(李範允).
- 혈성단(血誠團) : 191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 단장 김국초(金國礎).
- 야단(野團) : 1919년 만주 길림(吉林)에서 조직. 동학의 한 교파인 청림교(靑林敎) 계열. 단장은 신포(申砲)로 일명 아소래(我笑來)로 불림.[4]
-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 1919년 만주 안도현(安圖縣)내도산(內島山)에서 조직. 총재 이규(李圭).
이상 10개 부대 외,
-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은 대한독립군단 결성을 위해 12월 밀산(密山)에 대한신민회의 대표로 김성배(金聖培)를 파견했으나 성과가 없었다.[5]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洪範圖), 고문은 백순(白純)과 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은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은 김좌진(金佐鎭), 참모는 이장녕(李章寧)과 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은 지청천(池靑天)이었다. 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제1여단에는 여단장 김규식(金奎植)과 참모 박영희(朴寧熙), 제2여단에는 여단장 안무(安武)와 참모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 기병대에는 기병대장 강필립과 중대장 김창환(金昌煥), 오광선(吳光鮮), 조동식(趙東植) 등을 선임하였다. 여단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으로 대규모 병력이 되었다.[6] 그러자 역설적으로 대한독립군단은 대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과 피복, 군량 등 여러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다.
공산주의 계열의 상황[편집]
니콜라옙스크 사건 으로 불타서 내려앉은 니콜라옙스크 일본영사관 1920년 6월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赤軍)과 군주제, 자본주의, 반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백군(白軍)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 내전을 적백내전이라고도 부른다.
시베리아에서도 적군과 백군의 대립은 이어졌다. 또한 러시아 흑룡주정부가 독립하여 극동공화국이 되었고, 이 공화국은 볼셰비키 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백군을 지원하면서 연해주에서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공산주의 계열 한인무장부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에 공산주의 독립군은 적군(赤軍)에 협조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적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백군을 격퇴시켰다.[7][8]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과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일본군을 피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도 근거지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볼셰비키 세력이 강성한 극동공화국의 자유시로 향했다. 그곳에는 극동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한인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연해주 한인무장부대는 이만군대,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만군대는 사령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와 김덕보로 이루어져 있었고, 다반군대는 사령관 최니콜라이가 이끌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의 자유시 합류[편집]
코민테른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었다. 지원이 필요했던 대한독립군단은 흑룡강주 밀산에서 겨울을 나고는 러시아-만주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향했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김좌진이 자유시 합류를 반대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으므로 다시 간도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2012년 달네레첸스크(Dalnerechensk) 시청의 모습
독립군은 공산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로 나뉨.
소련은 대한독립군에게 공산당을 위해 싸울것을 요구 했으나 거절당함.
레닌은 공산주의계열과 손잡고 대한독립군을 제거.
생존자들은 공산군에 편입, 공산혁명군이 됨.(이들은 독립군이 아님)
친일논란이 있는 백선엽은 팔로군등의 공산게릴라군을 토벌한것.
백선엽을 모함하는건.
공산주의자들의 기만 전술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훼손하려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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