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관련 글을 보고서는 분명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이 초범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얼마전에 그런 취지의 글을 작성한바 있는데 사과드립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법의 범주에서 일부 특정 사건 (과거 정부에 의해 자행된 사법살인 등)과 연쇄살인이나 연쇄강도, 연쇄 강간범 등을 제외하고는 초범에게 실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고, 강간도 아닌 성추행 만으로 실형선고가 되는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일단 성추행은 형사사건입니다. 형사사건은 민사와 다르게 경찰을 통해서 사건이 접수되고, 경찰이 조사한 다음 검찰에 넘기고, 검찰에서 법원에 기소하면서 재판이 진행됩니다. 민사상의 책임은 대부분 금전적인 형태로 진행되는데 비해, 형사재판은 전과가 남고 빨간줄이 그인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는 매우 큰 스트레스고 압박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사실 공권력에서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기에 형사재판에 대해서는 피고인에게 공짜로 변호사를 붙여주는 국선변호인 제도를 운영하는 등 피고의 패소에 따른 문제를 고려하여 여러가지 안전제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분들이 배우셨을 형법의 핵심원칙이 나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 죄형법정주의, 그리고 증거재판주의입니다. 이 세가지가 바로 근대 형법의 기본을 이룹니다. 형사재판은 법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법으로 정해놓은 죄를 저질러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에 따른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인데, 죄를 지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재판받아야 하는 일반적인 사람이 약자인지라, 공권력에 그들의 권리를 최소한이라도 보장하기 위해서 만든 조건입니다. 거꾸로 말해서 이 3가지가 지켜지지 않은 것은 근대의 형법이 아니라 야만적인 형법을 고수하던 시절의 고대적인 법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관련해서 많이 배우는 말이 있습니다. 윌리엄 블랙스톤의 "열 명의 범죄자가 도망치는 것이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이 고초를 겪는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대학시절 교수님께서는 이런 표현도 쓰셨습니다. "의심스럽다면 피고인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판단하는 것이 법관의 자질이다"라고요. 참고로 무죄추정의 원칙은 대한민국 헌법 제27조 제4항에서 보장하고 있습니다.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중요한 이유는, 과거에 이루어지던 야만적인 고문이나 군사정권 시절에 잘 나타난바 있듯이 "너 잘못했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고문하던 것을 부정할 수 있게 하는 법조문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죄인에게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 무고한 죄인이 나오는 경우는 흔했고, 우리 나라의 군사독재 시절에도 무고한 사람들에게 경찰이 실적을 위해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한 사례는 많이 나옵니다. 무죄추정이 없는, 즉 다시 말해 유죄추정의 원칙이 무서운 이유는 "니가 잘못을 안했다면 니가 무죄를 증명해라"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해,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면 유죄라는 소리인데 이건 법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들에게는 참 멍멍이 같은 소리입니다. 검사가 법원에 기소한 이상, 유죄를 증명하는 책임은 검사에게 있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무죄를 증명할 책임도,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것만으로 부족해서 죄형법정주의도 있습니다. 죄형법정주의는 누구든지 법률과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처벌받지 않고, 행위 당시의 법률이 구성하지 않는 행위로 처벌받지 않으며, 동일범죄에 의해 거듭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것보다는 이것에 대해 파생되는 원칙이 더 중요합니다. 성문법으로 관습법에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기본적으로 법률에 명시된 것으로만 처벌을 결정하여야 합니다. 명확성의 원칙이 있습니다. 또한, 엄격해석원칙이 있는데 유추하여 해석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형법에만 적용되는 내용인데 판사가 멋대로 재판에 관련된 내용에 있어서 개입하거나 유추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즉, 판사가 마음대로 "너 이랬을 거야" 또는 "이랬을 가능성이 있어"라는 이유로 유죄선고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한지 증거재판주의도 있습니다. 유죄판결을 하려면 증거에 의해야 하고, 범죄사실의 증명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재판주의는 형사소송법 제307조에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법에서는 무고한 가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제도를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켜봐온 형사재판은 정말 신중하게 진행되었고, 다양한 검증을 하는 것은 물론, 설사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들이 억울해 미칠 지경이 된다고 하더라도 가해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또는 가해자의 범죄를 최대한 엄격하게 증명하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면 판사의 성향이나 이런 것은 잘 모르겠지만, 초범임에도 좀 과도하고 무리하게 선고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 재판에서 유죄로 볼 수 있을만한 정확한 자료는 피해자의 진술 뿐입니다. CCTV는 성추행의 순간을 전혀 담고 있지 못하고 (정확히 말하면 성추행을 했을 수도 있으나,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형사재판의 대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상 하지 않았다라고 간주하여야 하고, 했다고 보려면 그 입증을 검사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사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검사에게 요구하여야 했을 사항입니다) 정황이나 의심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네티즌이나 일반인의 관점이고 판사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증명해서 그 누가 보더라도 피해자나 그 가족이 분노할 수 있을 지언정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만한 판결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편결문의 유죄사실의 판단의 요지는 증인의 법정진술, CCTV영상, 그리고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며, 피해자가 사고와 의도적 추행의 차이를 착각할 이유가 없고, 피해자의 사건 직후 반응도 단순사고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사재판임을 고려하면 증거재판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고, CCTV는 추행의 순간을 담고 있는 결정적인 증거로 활용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굳이 우긴다면 정황증거 정도는 될까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양형의 이유로 제시했습니다.
피해자 진술에 의한 판결이 위험한 것은, 이 판결에 따르면 남성은 누구나 여자가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저 XX가 언제 어디서 어느 상황에서 날 만졌다"라고 외운 다음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을 가해자로 몰면, 100% 유죄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성이 지적장애가 없으면 거의 100% 사고와 의도적 추행의 차이를 착각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고, 사건 직후 피해자가 방방뛰면 단순사고로 인식하지 않겠다는 식의 내용이기에 여자가 마음만 먹으면 멀쩡한 남자하나 성추행 전과자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결론이 가능합니다. 또.... 유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가는 것은 결국 정말 죄가 없는 가해자의 방어권을 막는 것입니다. 이 건의 경우에는 명확한 증거가 하나도 없고 피해자 진술 하나이기에 저 역시 지인이 비슷한 상황에서 저에게 조언했다면 무조건 그런 적 없다, 내가 했다는 명확한 증거를 가져와라고 우기라고 조언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면 크게 맞아봐야 벌금이나 집행유예, 그리고 대부분은 무죄로 나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었고요.)
지극히 개인적인 추론으로는, 판사가 상대가 초범임에도 징역 6개월을 때린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 봅니다. (결코 합리적이지 않고, 판사입장에서입니다)
1. 재판법원이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청입니다. 여기 소위 말하는 범죄자들 사이에서는 형사재판 관련 형량이 높기로 유명합니다.
2. 최근 성추행 등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국민들의 관심과 공분이 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쨌든 성범죄로 들어가는 범죄에 집행유예나 기소유예, 또는 벌금을 선고하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실형을 선고하고, 나머지 판단은 2심으로 넘기는 아주 무책임한 판결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판사 입장에서는 어차피 2심에서 벌금나오면 똑같은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피고입장에서는 구치소에 수감되어 생활해야 하고, 나중에 벌금이나 집행유예 받아봐야 남는거 하나도 없습니다. 변호사 수임료 외에 출근하지 못하니 회사에서는 대부분 잘리게 되고, 경제적인 문제는 물론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합니다. 잘못한 것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배가됩니다. 그래서 형사재판은 최대한 신중하게 하도록 여러가지 대원칙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3. 상부의 오더가 있었을 가능성. 그런데 그간 판사의 판결을 고려한다면 그보다는 100% 본인의 판단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 아들을 키우고 딸을 키웁니다. 그래서 요새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초등학생인 아들에게는 "여자애들하고 손도 잡지 말고 가까이도 가지말고 그냥 투명인간 취급해라. 괜히 휘말리면 너만 손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직 말을 제대로 못하는 어린 딸에게는 뭐라고 가르쳐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다 맞는 말인데 한숨만 나오네요.
좋은 말씀 잘들었습니다.
정리를 너무 잘하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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