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머니는 병실에서 한 달 가까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꿈을 꾸고 계신 듯 잠자는 중에 가끔 웃음도 보이십니다.
깨어나 다시 움직이시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쪽 뇌는 이미 사망했다는 의사의 진단입니다.
얼마 전 가족들 다 모여서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했습니다.
40년생이시니 올해 여든 하나 되십니다.
수면 중에 웃으시기도 찡그리시기도 하는데 정말 서명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어머니께 들었던 당신의 유년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한의사인 외할아버지는 막내인 어머니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셨답니다.
환자 진맥을 할 때에도 어머니를 무릎에 앉혀놓고 할 정도였답니다.
하얀 말을 타고 마실을 다니셨는데 대여섯 살 되는 어머니를 외할아버지는 꼭 안장에 앉히고
자신은 고삐를 잡고 걸어 다니실 정도였답니다.
객지로 공부하러 갔다가 전쟁 통에 납북된 큰오빠를 평생에 그리워하셨습니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큰 외삼촌은 막내인 저희 어머니를 자기 자식보다 더 이뻐라 했다네요.
깨어서 정상생활을 하지 못하시는 어머니는 지금
꿈속에서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 시절을 살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눈을 뜨면 지친 몸과 나이의 현실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 눈은 뜨지 않은 채로 웃고 계신 모습은 소싯적을 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소녀가 된 듯합니다.
아버지를 만나 고운 연애를 하고 혼인 후 부산으로 와서
저희들을 낳고 키우기까지의 행복과 고생을 다시 복기 중이신지 가끔씩 누구를 부르는 듯도 하고.
아마 먼저 보낸 저희 큰누나를 만나고 계신 듯 눈물도 고입니다.
부산에서는 자갈치시장에서 생선 파는 아주머니들을 흔히 ‘자갈치 아지매’라고 부릅니다.
어머니는 자갈치 아지매입니다.
생선이 흔한 부산에서 자라난 저는 중학교쯤인가 친구네 집에 가서 고등어를 처음 먹어봤습니다.
어찌나 맛나던지 장사 마치고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를 보자마자 여쭈었습니다.
“엄마엄마, 오늘 경호 집에 놀러 갔는데 고등어라는 거를 구워주는데 그렇게 맛있더라.
우리도 고등어 좀 먹으믄 안 되나? 엄마는 고등어는 안 파나?”
어머니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범아, 내가 너거들 모자라는 거 없이 해줄라 해도 남들 앞에 기 안 죽는 정도밖에 안 되는 거라.
그렇게 풍족하게 못 해도 내가 생선 파니까 물고기라도 좋은 거 멕이보까 하는데
어디서 고등어 같은 거 먹고 와서 그런 기 먹고 싶다. 그라노?ㅎㅎㅎ”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는 가끔 고등어나 싸구려 생선도 가져오셨습니다.
다른 건 못해줘도 생선만큼은 생선장수이니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으셨던 겁니다.
어릴 때 흔하게 먹던 민어, 병어, 갈치, 조기, 상어, 참치(혼마구로) 등등은
지금 월급쟁이로선 큰 맘먹고 가끔씩 먹게 되는 형편입니다. 조기도 부새조기 같은 거나 사 먹네요.
말 잘 듣고 공부 잘했던 딸년들 덕에 많이 행복하셨는데
정작 아들 하나 있는 게 모자라는 짓이나 하고 돌아다닌다며 웃으셨던 어머니.
어머니와 함께 하며 제일 가슴 아팠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어머니 나이 마흔예닐곱,
쉰인 지금의 저보다 어린 사람이라 생각되어 더욱 아려오는 기억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영도의 청학성당 계단에서 어머니와 막내 누나, 저 이렇게 셋이 앉아 오래 얘기를 나눈 기억입니다.
아버지 사업부도로 힘들게 구겨 살던 단칸방에서조차 쫓겨난 신세가 되어
아버지는 시골로 나머지 누나들은 누나네 친구들 집으로 흩어져 살기로 하고
그렇게 그 계단에서 셋이 모여 마지막 가족회의를 했던 기억입니다.
어머니는 같이 장사하시며 혼자 사는 아주머니 네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막내 누나와 저는 어머니의 이종사촌인, 그러니 친척이라고 하기도 먼 5촌 이모집에서 신세 지기로 했습니다.
누나와 저에게 용돈을 쥐어 줬습니다.
누나 1,300원. 저 1,000원.
그 액수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당부도 기억납니다.
“선아, 이모 말 잘 듣고, 눈에 띄는 짓 하지 마라이,
니는 잘할 낀데 범이 저기 문제네. 범아 아무 말도 말고 그냥 몇 달만 참아라이.”
어머니 눈물 흘리며 우는 모습을 그 전에도, 그 이후인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으니
정말이지 어머니 인생에 가장 힘드셨던 기억일 거라 생각됩니다.
이제 유언도 따로 없이 이 상태로 가실 어머니
제발 삼십 수년 전의 이 기억은 제가 가지고 살아갈 테니
제발 이 기억만은 없는 채로 좋은 곳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외할아버지랑 둘이서만 장에 가서 외할머니가 먹지 마라고 한 거
외할아버지랑 웃으시며 드셨다는 추억,
아버지 만나 처음 손 잡기까지의 밀고 당김
그리고 처음 뽀뽀하셨을 때의 두근거렸던 마음,
큰누나 낳고 누워있을 때 고생했다며 손잡아 주셨던 아버지의 보살핌
첫 손주 안고 기뻐하시며 큰누나 잘 산다니 행복하다는 기억,
그리고 막내인 제 자식들, 어머니께는 첫 친손주들 재롱 보며 이뻐하시던 기억
참말로 고맙습니다. 잘 키워주셔서 고맙고, 내 자식들 잘 키울 지혜를 머릿속에 넣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실 동안 좋았던 추억만 되새김하다가 가시길 바랄 뿐입니다.
기뻤던 기억도 있는데 ........
다들 훌륭하신 부모님들이 낳아 준 우리들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가시기 전인데도 눈물이 나더군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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