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내려온거 같은데...여기서는 이런거 안먹힌다...일베 버러지들아 집에서 가족들 모아놓고 얘기해 알았지?
그리고 요 밑에 찬찬히 읽어보고 집에가서 좆잡고 반성들하세요...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1924-2009년 85세 사망
재위는 1998-2003년 5년간이고 전남 신안 출신으로 6,7,8,13,14대 5선 국회의원이다
1943년 19세 목포 상고 졸업 후 목포 상선 경리 사원
1945년 21세 여운형의 건준 (건국 준비 위원회) 목포 지부 가입, 목포 청년동맹 가입
9월에ㅡ 건준이 해체되자
1946년 22세 김두봉과 연안파 공산당이 만든 조선 신민당 입당 조직부장되나 갈등으로 탈당
1947년 23세 한민당 목포 지부 입당. 화물선 동양 해운 창업 (연안 운행 해운업)
1948년 24세 목포일보 인수
1950년 26세 목포일보 사장
1955년 31세 야당인 민주당 입당
1957년 33세 장면을 대부로 천주교 영세받고 민주당 상임 위원및 노동부 차장
1958년 34세 민주당 후보로 4대 국회의원 강원도 인제 출마 낙선
1959년 35세 인제 재보선 출마 낙선 . 부인 차영애 병사
1960년 36세 민주당 대변인, 5대 국회의원 선거 인제군 출마 낙선
1961년 37세 5.16 후 이휘호와 재혼
1963년 39세 6대 국회의원 선거 목포 출마 당선
1967년 43세 신민당 창당 참여 대변인
1970년 46세 이철승, 김재광과 연합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 (YS를 누르고)
1971년 47세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634만표)에게 패배 김대중 (539만표)
100만표 이상이 조작된 부정 선거라고 주장
1972년 48세 유신 헌법
1973년 49세 김대중 납치 사건
1987년 63세 6월 민주 항쟁 후 통일 민주당 상임 고문
1998년 74세 대통령 직무 수행, 1-3월 금 모으기로 $ 21억 (2,5조원) 금을 모으다
2000년 76세 대통령 임기중 노벨 평화상 수상
대통령 재직시 국무총리는
김종필 1998-2000
박태준 2000
이한동 2000-2002
김석수 2002-2003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기는 인동초가 그의 별명이다
박지원은 1942년 생이니 지금 78세
1970년 28세 전남 진도 출신으로 단국대 상학과를 나와 LG 상사 입사
1972년 30세 동서 양행 뉴욕 지사장.
사업에 성공해 정치적 망명 중인 DJ의 생활비를 대다
1987년 45세 6월 항쟁후 DJ가 사면 복권되 정계 복귀하자 미국 영주권을 정리하고 귀국
1992년 50세 민주당 전국구 공천으로 14대 국회의원
1995년 53세 새정치 국민회의 대변인
1996년 54세 15대 총산 출마 낙선
1997년 55세 국민회의 총재 특별 보좌역
1998년 56세 대통령 비서실 공보 수석
1999년 57세 문화 관광부 장관
2002년 60세 대통령 비서실장
2006년 64세 대북 불법 송금,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 혐의로 징역 3년 선고
2007년 65세 특별 사면 조치, 형 집행 면제, 석방, 복권,
18대 총선 무소속 출마 당선 (목포)
2008년 66세 민주당 복당
2010년 68세 민주당 원내 대표
2012년 70세 민주 통합당 최고 위원, 19대 총선 목포 당선
2016년 74세 국민의 당 원내대표 . 20대 총선 목포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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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946년 8월 6일(양력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업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 1966년에 졸업하였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어망 제조업체에 잠시 다니다가 그만두고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였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1971년 만기제대한 뒤 그만두었던 사법시험을 다시 준비하였으며, 1973년 1월 동향인 권양숙(權良淑)여사와 결혼하였다.
1975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이듬해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이후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항쟁에 앞장섰다. 같은 해 대우조선에 다니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노동법의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증인들을 추궁하여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대하여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이듬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 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을 거쳐 1993년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고,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 지역구를 포기한 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낙선 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김대중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었다.
이후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펼쳤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유효투표 총수 2476만 141표 가운데 1201만 4277표(48.91%)를 얻어 1144만 3297표(46.59%)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2004년 초,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같은 해 3월 12일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소수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반대를 저지한 채 국회 본회의에 탄핵소추안을 기습상정하였고, 다수를 점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투표하여 찬성 193, 반대 2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킴으로써 국무총리 고건이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으며, 같은 해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임기중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여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력 일간신문을 비롯한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는 등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친북좌파라는 비난을,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한편, 정치인생을 일관하여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對美)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북한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다.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10월 4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을 발표하였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오리농사, 마을청소에 참여하는 등 평범한 전원생활을 하는 한편,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였고, 건전한 토론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여 세상과 소통하였다.
그러나 퇴임할 때 대통령 재임시의 기록물 복사본을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하여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의하여 측근과 친형, 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2009년 4월 30일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5월 23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내용의 유서를 컴퓨터에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저서에 자전적 일대기인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를 비롯하여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2002) 등이 있다. 2004년 영국 왕실로부터 최고훈장인 바스 대십자훈장(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GCB)을, 2007년 카타르 정부로부터 독립대훈장을 받았다.
2017년 5월 10일 취임선서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에서 피난민 가정(부: 故 문용형, 모: 강한옥)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인 그의 아버지 故 문용형은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 때 남한으로 피난해, 거제의 피란민수용소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공무원 경력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노무자로 일했고, 어머니는 계란행상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북한 출신 피난민들이 많이 거주하던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1965년 남항초등학교, 1968년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부산 최고 명문인 경남고등학교(25회)에 수석 입학했다. 1972년에는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 진학 이후에는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했으며, 1975년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집회를 주도하다 구속,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석방 이후에는 강제로 군에 징집돼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됐다. 1978년 2월 31개월 만기 제대했으며 1979년 초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복학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을 계속해 그해 4월 학내 시위 와중에 사법고시 2차를 치렀다. 그러다 1980년 5?17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실시된 예비 검속으로 체포됐고, 청량리구치소 수감 중 제22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 소식을 받게 된다. 석방 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으며, 캠퍼스커플이었던 김정숙 여사와 7년 연애 끝에 결혼해 준용·다혜 씨 등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문 대통령은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하고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도 수상했다. 그는 판사를 지망했지만 유신 반대 시위 전력으로 임용이 좌절되자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하고 고향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부산에서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두 사람은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 ‘법무법인 부산’에서 시국 사건을 도맡으며 부산은 물론 울산·창원·거제 지역을 망라하는 노동·인권변호사로 활약했다. 특히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국본(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을 만들어 노 전 대통령이 상임집행위원장, 문 대통령이 상임집행위원을 맡으며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88년 노 전 대통령은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들어섰지만, 문 대통령은 노동문제 변호사 길을 이어갔다.
변호사 생활을 하던 문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 출마한 노 전 대통령의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았고, 2003년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민정수석이 됐다. 그러나 당시 치아 10개가 빠지는 등 격무로 인한 건강 악화로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2004년 히말라야 트래킹 도중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 소식을 듣고 곧장 귀국해 변호인단의 간사를 맡았다. 탄핵 재판이 끝나고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참여정부와 임기를 함께 마친 문재인은 경남 양산의 집으로 돌아왔으나,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장례 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으며,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후 그를 향한 정치 참여 요청은 계속됐고 특히 2011년 6월 그의 자서전 <운명>이 베스트셀러로 주목받으면서 그 요청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그는 2011년 말 민주통합당 창당에 참여한 데 이어 2012년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리고 총선 승리 2달 후인 그해 6월, 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으며 이후 야권 단일후보가 됐다. 그는 2012년 12월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나서 야권 후보 역대 최대인 1469만 표(득표율 48%)를 얻었지만 약 100만 표 차이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후 2014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권 도전을 선언하고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에 당선됐다. 그리고 그해 10월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이 바뀐다. 그는 당대표가 된 이후 혁신위원회를 통해 공천 제도를 투명하게 만드는 등 당 혁신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으나 이 과정에서 친문(친문재인)과 비문(비문재인) 진영 간 극심한 갈등이 일었고, 이는 국민의당 분당(分黨) 사태로 이어졌다.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지만 문 대통령은 대규모 인재 영입과 ‘10만 온라인 당원’을 모으면서 당의 내실을 다녔으며, 당 대표직을 내려놓은 후 백의종군으로 전국을 누비면서 2016년 4·13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2016년 하반기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문 대통령은 적폐청산의 최적임자로 부각됐다. 그리고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의 박 전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이 내려지면서 5월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됐다. 그는 4월 이재명 성남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최성 고양시장 등과의 당내 경선을 거쳐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리고 2017년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41.1%의 득표율(1342만 3784표)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정오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취임선서 행사를 하고 임기 5년의 제19대 대통령에 공식 취임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선서에 이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역사와 국민 앞에 두렵지만 겸허한 맘으로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소명을 다할 것임을 천명한다."고 밝혔다.
Good luck for you !!
뭐 독립군 및 일제에 저항한 독립투사 분들을 잡아들이고 사살하던 왜놈들의 간도특설대 장교하던 인간도 100살을 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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