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제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다닐때 10년정도 타지에 갔을뿐,
지금도 거제도에 살고 있다.
어릴적 나의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었다.
대우조선해양 그당시 대우중공업에 다니셨고,
개도 만원짜릴 물고다닌다던 그 시절이었다.
IMF 때는 고환율로 오히려 조선소는 역대급 호황이었으며,
아버진 성과급을 받아오실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보였고,
거기에 소소한 나의 선물는 덤이었다.
대우조선 기숙사엔 그당시엔 직영들 가족들이 북적북적였으며,
그 좁은 기숙사에서 다들 애들 2~3씩은 낳고 잘 살았다.
계모임할때는, 집이 좁아 아이들은 복도에서 먹었고, 놀았다.
그랬던 시절이었다.
대우자동차가 아니면 대우조선소엔 들어 갈수가 없어서
아버지 자동차도 대우차였다. 르망, 그리고 누비라 까지
아버진 대우차를 타고 다니셨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버진 내가 대학갔을때, 대학 그만두고
직영 지원해라, 아빠가 어떻게든 직영 만들어 줄테니.
물론 싫다고 했다.
나에겐 젊었을적 꿈이 더 크고 대단해 보였기에.
그꿈에 실패 할때즈음, 아버지께서 몸이 안좋다며
거제도로 다시 돌아오면 어떻겠냐 하셨다.
그렇게 거제도로 다시 왔을땐,
많은것이 변해 있었다.
직영, 그리고 협력사 이렇게 두개의 계층이 나뉘어 진듯한 거제도에선
선자리에 나가면 협력사라고 하면 주선자에게 욕을 엄청 한다고 하더라.
직업훈련소에 가서, 용접을 배우고
협력사에 취직을 하였다. 아버지 계모임에 자주 보던 아저씨가, 대표 였다.
직영을 다니다, 부서에서 협력사를 차리라 하여 차렸다고 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아니 더 많은 일을 시간에 쫒기며 일을 하는데 불구하고,
직영의 임금의 절반가량 되었다.
온몸은 골병이 들어가며, 멸시 받으며, 그렇게 약 5년간 찌들어가며,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꾸려나갔다.
아버진
날 직영을 못만들었다고 항상, 후회하시며, 살아가셨다.
협력사에 다니면, 그랬다.
늘 가난에 시달리면서,
보이지 않는 계층의 최하단에 있는 현대판 상놈이었다.
물론 지금은, 안다니지만,
지금의 파업에 대해 많은 공감을 하며, 그들을 응원한다.
상여금은 없어지고, 최저임금보다 약간 높은 임금을 받으며,
돈이 없어 투잡으로 배달대행을 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협력업체분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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