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량리에 회기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한자로 回基洞이라고 쓴다. 하지만 이 동네의 본래 이름은 회기(懷基)이다. 회묘 터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회묘는 바로 연산군의 생모 윤씨(1445~82)의 무덤이다. 지금 폐비 윤씨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의 서삼릉 지역에 이장되어 있다.
연산군의 생묘 윤씨에게는 폐비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윤씨는 성종의 왕비였다. 자태가 빼어났다고 하는데, 성종보다 열두 살이나 연상이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불과 여덟 살밖에 많지 않은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 때문에 성종 10년(1479년)에 폐출되었다가 이듬해 38세의 나이에 사약을 마셔야 했다
윤씨가 죽은 뒤 7년이 지난 1489년에 성종은 ‘윤씨지묘’라는 표석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1494년에 성종 역시 38세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윤씨의 아들 연산군은 20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임사홍의 밀고를 계기로 연산군은 성종 때의 시정기를 열람하고, 자신의 생모는 정현왕후(자순대비)가 아니라 폐비 윤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생모를 위해 효사묘를 세우고 무덤을 회묘라 했다. 재위 10년(1504년)에는 생모의 시호를 제헌(齊獻)으로 추증하고 무덤을 회릉으로 격상시켰다. 묘호에 품을 회(懷)자를 쓴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연산군은 생모를 폐위시킬 때 관여한 사람들과 윤씨의 복위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탄압하고 공신들을 억압했다. 이 사건이 갑자사화이다. 그러다가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 죽게 되었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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