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흔히 잘못된 상식 중 하나가
마치 거의 모든 왜군이 조총으로 무장했으며
신무기 조총덕에 조선군이 맥을 못춘것으로 알고있는데
실상은
조총은 값이 매우 비싼 무기로 왜군들중에서도
조총을 들수있는자는
극소수였고 주력인 이시가루 대다수는 그냥 장창 한자루가
전부였습니다.
반면
조선군은 각종 화포, 총통, 신기전 등 왜군을 이미
화력으로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마치 조선군이 조총때문에 화력에서 열세여서 졌다는것은
말도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보다는 일본애들은 어릴때부터 칼갖고 놀고 자라고
천한 이시가루조차 창검술의 달인인데 비하여
우리 조선은 땅파먹고 논매고 밭매느라
공자왈맹자왈 하느라 단병접전에 쥐악이여서
육상에서 연전연패 했었을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본전국시대를거친 살인귀 왜적이
월등하다는것 결코 아닙니다.
칼잘듣나 시험삼아 농부를 벤 사무라이 일화는
오히려 일본의 열등함을 잘나타냅니다.
오히려 우리 조상님들은 인문학의 발전을 이룩하고
왜놈들보다
훨씬 고상하고 고결한 가치를 추구하고 이룩했으니까요
선봉 10만 대군 전부를 무장시키진 못했드라도 예를들면 중대별로 2개소대 정도만 조총으로 무장시켜 일제히 발사하면 상대에게 충분한 정신적 데미지는 줄수있었죠
조선조정에서도 조총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편전에 대한 자부심
습기나 비가오면 사용하지 못하는 단점때문에 활을 고집했지만 임란이후 조총병을 양성할 정도로 조총의 위력을 인정했고 광해군때는 청나라의 파병요청 수차례에 조총병을 파견하여 러시아와 싸워 승전도 합니다
물론 조총병중 상당수는 포수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총부대의 활약도 무시할정도는 아니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훈련과 실전으로 방진이 잘짜여 있었나봐요.
배에 뛰어든 이시가루 하나를 갑사 열명이 당해내지 못하였다는 우리측 기록이 있을정도죠
조총병이 소수긴하나 긴 장전시간과 낮은 명중률 커버하려고 1열 사격후 뒤로빠져 장전하는사이 2열이 교대로 사격하는등 전기전술을 육성한것이 조선육상군으로서는 치명타였다고 봅니다.
반대로 왜구는 전국시대에 얻은 백병전 토대로 최강수준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당시 명나라조차도 상대가 안됐다는 기록도 있고요
더구나 조선 정벌후 조선을 영지로 받게될거라는 후한 포상제도
그에 비해 조선군은 양반들의 병역면제, 양인들이 병역의무를 저버리기위해 스스로 노비가 되는 상황 입니다
조선은 세종때 아비 태종이 처가를 몰살시켜가며 남자가 양인이면 첩이 노비였더라도 양인신분을 주는 법을 만들었는데 태종 사후 3년만에 신하들에게 볶이다 못해 세종이 아비가 양반이라도 첩이 노비라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법을 통과시키면서 조선은 망해갈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립니다
제가 세종보다 태종을 군주로서 더높이 인정하는 부분 입니다
본디 조선초 양반이란 동반과 서반 즉 문반과 무반의 관리들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양반이라는 것은 세습되지 않았고 양인 즉 노비와 중인이 아닌 평민들은 과거시험을 볼수 있엇고, 사대부 지주라도 세금에서 자유로울순 없었죠. 그러나 양반의 권리를 향상시켜준것이 세조에서 성종으로 이어지는 왕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난을 통해 정권을 잡았고, 그들을 도왔던 공신들 이후 양반들의 권리를 과도하게 보장해주었죠.
이후의 왕들은 이렇게 공신을 비롯 공적으로 권력을 잡은 훈구들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향촌의 사대부를 대거 육성했고, 이들이 정권을 잡자 양반들의 권리는 더더욱 확대되게 됩니다.
결국 양인이 과거시험을 볼수 있다는 법은 유명무실해졌고, 혜택을 대를 이을 수 없었던 양반의 권리는 초시 합격자들 까지 포함하게 되며, 나중엔 사대부 자체가 당연한 권리로 여겼죠. 조선초 고려조의 폐단이라 욕했던 음서도 부활했죠. 사대부는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고, 지주는 세금을 소작농에게 부과시켰으며, 정예 상비군 집단이었단 갑사는 그 직함을 통해 양반이라는 권리를 누리고 나아가 수령 등의 지방관으로 나가는 경로로 전락해 버립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이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더러워질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죠.
세조가 조선에 파국을 가져온 결정타였죠
강한왕권이 어쩌고 하면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며 적통이 방계로 넘어가죠
특히 난정공신들을 대우하면서 태종이 피땀으로 숙청한 공신들의 세상이 된게 세조때 입니다
공신중 하나가 숙부를 때려죽여 암매장하자 숙모가 세조 행차길에 나무위에서 하소연해보지만 세조는 공신을 처벌할순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공신의 종을 사형시키는걸로 마무리 할 정도로 공신의 위력이 세집니다
선봉 10만 대군 전부를 무장시키진 못했드라도 예를들면 중대별로 2개소대 정도만 조총으로 무장시켜 일제히 발사하면 상대에게 충분한 정신적 데미지는 줄수있었죠
조선조정에서도 조총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편전에 대한 자부심
습기나 비가오면 사용하지 못하는 단점때문에 활을 고집했지만 임란이후 조총병을 양성할 정도로 조총의 위력을 인정했고 광해군때는 청나라의 파병요청 수차례에 조총병을 파견하여 러시아와 싸워 승전도 합니다
물론 조총병중 상당수는 포수출신이었습니다
조총 도입초기에는 매우 고가 였습니다만. 오다노부나가 이후 대량운용이 보편화되면서 양산되었죠
조총 뿐 아니라 창검류, 부식류, 장갑류 등 균일한 품질의 양산품이 분업화된 생산 체계에서 양산되었습니다.
또한 무역과 상업의 발전으로 자금적 여유와 물자의 양도 엄청나게 증가했죠.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로 인해 보급에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면 왜란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병졸의 차이를 우리는 흔히 단병접전의 질을 두고 이야기 합니다. 뭐 바꿔말하면 훈련량과 경험의 차이죠. 또한 직업군인이라는 전문집단과 병농일치의 비전문가 집단간의 차이였죠. 뭐 이건 수년간의 왜란을 거치며 개선됩니다.
정유재란 즘에 가서는 조선군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일본측에서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임진왜란까지 일본의 직업군인 집단 이시가루 등은 엄청난 위협이었을 겁니다. 거기에 전국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병종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집단전에 능숙했던 일본군이 장창 집단군과 조총의 집단 운용 거기에 간단하게 만들고 효과가 매우 좋은 대나무뭉치 등의 경험적 차이는 비교 불가였죠.
0/2000자